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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판타지의 교합, 1Q84

- 무라카미 하루키

 미리 말해두자면 나는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는다. 한때 유명 작품을 좀 읽긴 했지만 내 취향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후 아예 관심도 두지 않았다. 이 소설을 읽은 건 일부분 참고할 게 있어서였다.

 서사는 매우 흥미진진하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여기다 옮기고 싶진 않다. 분량이 긴 만큼 간단한 요약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야기가 거의 전부인 소설이기 때문이다.

 판타지의 공간은 기존의 판타지 소설과 완전히 다를 수는 없을 것이다. 세부적인 설정은 분명 신선한 점이 있고 인물과 사건은 잘 엮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잘 읽히고 흥미진진한 소설이, 지루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내 편견이 이리 심한가, 한참 고민했다.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젠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우선 지나치게 장황하다. 설명은 늘어지고 같은 설명은 너무 자주 반복된다. 지루할 틈 없이 자극적인 정사신이 들어가는데 이게 소설의 맥락과 너무 격이 져서 오히려 흐름을 놓치게 만든다. 조르바 류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듯하지만 하루키는 여성의 대상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보인다. 나는 이렇게 쿨해요, 여성을 존중하거든요, 라고 떠벌이는 말쑥한 차림의 댄디보이 같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하루키의 능력을 함부로 폄하하는 건 아니다. 그의 통찰은 인간의 본성을 꿰뚫는 면이 있고 서사는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흐른다. 그럼에도 너무 많은 걸 대중적 시선을 염두에 둔 채 버무려놓은 소설은 재료만 많이 넣어 비싸게 올려 받은 짬뽕 한 그릇을 연상시킬 수밖에 없다.

 더불어 미안하지만, 나는 하루키의 통찰이 하나도 놀랍지 않다. 그 정도의 통찰을 하는 작가는 널렸다. 그 정도의 경륜에 그 정도의 통찰이라면 반성부터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감히 말하건대, 하루키는 대중소설로 전환을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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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모모

살인의 정당성 혹은 삶의 정당성, 컨설턴트

- 임성순

 살인을 설계하는 일을 하는 주인공, 즉 이 소설은 살인에 관한 소설이다.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통상적으로 그 어떤 범죄보다 비윤리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주인공은 직접 살해를 하는 게 아니라 살인에 관한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이다. 이는 그가 죄의식에서 비껴나갈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준다. 직접 총질을 하는 사람에 비해 원격으로 미사일을 쏘는 사람의 죄의식이 훨씬 적은 이치다. 물론 소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주변인에게 그 화살이 돌아옴으로 인해 화자는 자신의 행위가 실질적 살인 행위와 다르지 않음을 실감하게 된다. 더불어 작가는 자본에 의한 살인도 언급한다.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아무 방어막 없이 죽어나가는 약한 나라의 사람들. 그것 역시 실질적 살인이 아니냐는 물음은 신인인 작가에게는 도발적인 질문이었으리라. 물론 이것이 신선한 질문도 아니었고 그렇게 진행되는 서사는 다소 뜬금없었지만 작가의 의도만큼은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세부적인 스토리에 매우 많은 공을 들였고 가독력이 있어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결말에서의 해피엔딩은 맥이 빠졌다. 작가의 질문이 흐트러지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뻔한 살인이라는 소재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점이 고무적이었다.

 내 소설을 위한 텍스트로 이 작품을 읽었다. 작가는 말한다. 옳다고 믿는 것은 믿고 싶은 걸 믿은 게 아니냐는, 그것은 비겁함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느냐는. 젠장. 나도 주제가 그건데 미친 듯 머리가 복잡하다. 여튼 나보다 잘 썼다. 인정 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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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모모
2015. 7. 13. 12:17

촐라체 - 박범신, 푸른숲 내가 읽은 책2015. 7. 13. 12:17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아내는 지난한 과정, 어쩌면 등반

- 촐라체

 스토리는 단순하다. 아버지가 다른 박상민과 하영교 형제는 각자 가슴에 상처와 빚을 갖고 촐라체 등반에 나선다. 대부분의 내용은 등반의 과정에 할애되어 있고 그들의 이야기는 조금씩 삽입되어 있다. 어쩌면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은, 그러나 충분히 짐작할 만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현실을 외면한 채 가학적인 등반을 선택하는 두 남자, 좀 비겁한 게 아닌가. 그렇지 않다고 나는 말할 수 없다. 남겨진 자들,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피하기 위한 목적은 분명하다. 다만 단순한 도망은 아니다. 등반은 결국에 그들이 짊어져야 할 짐에 대한 예행연습 정도로 느껴진다.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 비겁하므로, 굳은 다짐 없이 모든 문제의 정면에 나설 수 없을 때가 많으므로.

 여로형 소설의 패턴이고 예상을 뛰어 넘는 반전이나 비극도 없다. 상당히 잘 쓰인 대중소설이다. 그래서 나는 도통 재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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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모모

내 이웃의 안녕

- 표명희 소설집

1. 씨에로

 과거와 현재의 문제를 다각도의 시선으로 다루었다. 과거를 짊어지고 사는 것이 반드시 현재에 부적응한다는 도식과는 다른 것임을 보여준다. 가독성은 있으나 스토리 자체가 변별력이 없다.

2. 달팽이를 길러야 할 때

 다른 존재의 삶에 대한 주관적 판단의 위험성 - 어떤 방식으로든 삶은 존재하는 것이고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타자가 판단할 수는 없는 일. 비교적 메시지가 명확하고 소재가 잘 어울어짐.

3. 쇼핑 좋아하세요?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대형마트, 그 안에도 고급에 대한 욕망은 버젓하다. 타인의 삶을 관음하고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두 여자의 만남. 결국 솔직해지지 못하는 그녀들. 그러나 그들의 욕망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쇼핑을 통한 대리만족의 이면에 깃은 쓸쓸함은 잘 그려졌다.

4. 내 이웃의 안녕

 공동주택.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환경. 그러나 불편의 지각 외에 서로에 대한 존재감은 미미하다. 실제의 이웃이 아닌, 상상 속에서 그려낸 이웃에 대해 혼자만의 감정을 가지는 게 전부.

5. 바닥

 밑바닥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작 필요한 건 모든 걸 벗어버릴 수 있는 용기. 그러나 이런 깨달음은 너무나 식상하고 전형적이다. '모진구'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조금 더 살렸다면 좋았을 걸.

6. 소품

 일상에 관한 미시적 묘사에 중점을 둔 작품. 소품처럼 하나가 부족하거나 어긋났을 때 가치가 드러나는 삶의 단면? 대략 그 정도로 파악.

 7. 고흐의 침실

 차이를 좁히지 못하는 연인이 번갈아가며 독백하는 형식. 독백이라는 편한 수단은 플롯의 치밀함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다소 안이하게 설정된 듯한 느낌. 하나의 대상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두 인물의 시선은 그 인물을 그대로 드러냈다.

 

 두 권의 소설집, 두 편의 장편소설을 출간한 소설가이지만 이 작품집은 전반적으로 실망스러웠다. 안정적이지만 진부하고 식상하다는 점에서. 좀 더 치열해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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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모모
2015. 7. 5. 19:54

보이지 않는 영화 - 허문영, 강 내가 읽은 책2015. 7. 5. 19:54

보이지 않는 영화

 내게 영화는 짧은 소풍 같은 휴식과 놀이의 개념이다. 그럼에도 좋은 영화에 대한 욕구, 영화를 더 읽고 싶은 욕심은 늘 있었다. 영화를 늘 소설적으로만 읽어왔기에 호기심을 갖고 보게 된 책이다.

 1부에서는 영화가 폭력을 다루는 방식과 폭력을 관음하는 개인을 다뤘다. 정당화 된 폭력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 예시로 '아덴만의 여명'을 든 것은 매우 적절했다. 더불어 숭고한 저속함의 비예술 장르로 무한도전을 언급했다. 어린 아이의 그것처럼 잔인하고 무모하며 목적이 없는 순수. 그러나 방송이라는 장르가 가치를 떠나 존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이후 '죽음'을 다룬 영화들을 소개했다. 나 역시 죽음에 관한 여러 가지 고민을 갖고 있고 내 작품에서 죽음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늘 고민하고 있기에 유용한 화두였다. 언급된 영화 몇 편을 찾아 볼 얘정이다.

 "부재의 환기", 응시, 오즈와 홍상수가 택한 방식이라는데 홍상수의 방식에 불만이 있는 나로서는 의제에 비해 표현된 방식은 매력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2부는 영화마다의 해석으로 이루어졌다. 보고 나서 정말 난감했던 영화, 코스모폴리스에 대한 해석은 영화를 그렇게 어렵게 봐야 하나 싶은, 어쩌면 안일함에 기초한 반감이 들었다. 내가 보았던 영화의 뒷이야기, 예를 들어 워낭소리의 후문은 가히 불쾌할 지경이었다. 나 역시 워낭소리에 별 감흥이 없었던 터라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이 시원했다.

 전반적으로 어렵지 않게 기술되어 있다. 굳이 필요한가 싶은 전문, 혹은 인문용어만 제외한다면. 영화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이 무겁지 않게 접근하기에 적당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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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모모

인간이라는 미지의 목적지

- 불타버린 지도

 사라진 남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은 탐정. 의뢰인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살며 의뢰의 목적이나 방향에 대해서는 도통 종잡을 수 없다. 의뢰인의 남동생은 미지의 인물, 결국 주먹의 세계에서 소년매매춘 알선을 하는 자로 살해된다. 알 듯하다가도 다시 꼬여버리는 그 세 사람의 관계. 방향을 잡는 듯하다가도 꼬여버리는 추적. 뻔하디뻔한 도시에서 작은 단서로 실종자를 찾으며 탐정은 인간에 대해 점점 더 혼란스러워한다. 추적 중 사건에 연루되어 구타를 당한 후 기억을 잃는 탐정. 실종자를 찾으려던 단서는 자기 자신을 찾는데 역이용된다.

 실종이라는 소재는 결국 자기 자신의 정체성, 혹은 인간에 대한 본질적 탐색을 위한 장치로 사용된다. 이 작품 역시 카프카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지만 어떤 면에서 분명 카프카를 뛰어넘고 있다. 서사에 의존하기보다는 묘사와 이미지에 의존하여 철학적 모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묘사들이 곳곳에서 튀어 나오는데 이는 가독력에는 방해가 되지만 전체 작품의 분위기를 충분히 담아내고 있다.

 지도(삶의 방향성)를 갖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사람들, 정작 중요한 지도(자신의 정체성)는 갖고 있지 않은 건 아닐까, 하는 물음.

 작품 속에서 밝혀지는 건 거의 없다. 실종자의 행적, 실종의 이유, 세 사람의 관계 등. 속 시원하게 밝히는 결말은 아니리라 예상했지만 정말 아무것도 밝히지 않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역시 아베 고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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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모모

존재에 관한 아름답고 파격적인 질문

- 그로칼랭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출간한 첫번째 소설이다. 로맹 가리의 작품을 많이 읽어봤지만 이렇게 파격적이고 아름다운 느낌은 처음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쿠쟁은 그로칼랭이라는 비단뱀을 기르게 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그로칼랭에 투영한다. 그럴 것이 쿠쟁인 다른 사람들의 화법과 사고를 이해하지 못하는 소외된 인물이다. 그는 언뜻 자신의 고독을 즐기는 듯 보인다. 그로칼랭에 대한 집착, 그로칼랭의 먹이로 들였던 흰쥐에 대한 동정심, 태엽을 감아줘야 살아나는 시계 등 자신이 사랑과 관심을 주어야 할 대상을 끊임없이 찾기 때문이다. 쿠쟁의 사랑의 대상은 뒤레퓌스라는 한 여인에게도 향해 있다. 그로칼랭을 들인 것이 그 여인과 같은 지역 출신인 아프리카라는 사실은 쿠쟁에겐 고무적인 일이다. 쿠쟁은 차라리 뒤레퓌스가 인종차별을 심하게 받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자신이 해줄 역할이 있는 것이다. 쿠쟁에겐 불행히도 시절이 이미 너무 많이 지나 있었다. 그러나 뒤레퓌스는 쿠쟁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거절과 무관심조차도 파악하지 못하는 쿠쟁. 선민의식과 반페미니즘이 바탕에 깔려 있다 해도 그런 의식마저 타인에게 위해가 되지 못하는 존재이다. 다만 소설 전반에 계속 나오는 사환의 반정부 투쟁 합류 권유가 쿠쟁의 저항적 내면을 간접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결국 쿠쟁은 뒤레퓌스를 집성촌에서 만난다. 쿠쟁은 뒤레퓌스가 당황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뒤레퓌스는 자신이 하는 일을 즐거워하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 즉. 뒤레퓌스는 쿠쟁의 사랑이나 관심 따윈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후로 쿠쟁은 그로칼랭으로의 변신에 적극적으로 변한다. 두 가지 결말 중 작가가 원한 결말로 판단하건데 쿠쟁은 탈피를 거듭하는 그로칼랭이 숨긴, 결코 다르지 않은 자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관계 속에서는 인간이지만 자기 자신 안에서는 온전한 비단뱀인 것이다. 환상적이고 난해하고 파격적인 결말에 대한 이해는 모두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쿠쟁이 스스로를 비단뱀으로 여긴 것이, 혐오스러운 존재마저도 그저 살아가는 자연이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여겼다.

 돋보였던 것 하나는 모순되고 뒤틀린 문장이다. 한 문장 안에서도 그렇지만 연결된 문장에서도 그러하다. 쿠쟁의 의식을 쫓아가는 문장이기에 그것은 쿠쟁의 캐릭터를 반영한다. 매력적이고 놀라운 문장과 사고 구조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로맹 가리의 모든 작품이 수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은 내가 권하고 싶은 작품 목록에 꼭 넣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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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모모

소외된 자들이 스스로를 칭하는 이름, 오타쿠 혹은 오덕

- 열광금지, 에바로드

 내겐 이름조차 생소한 일본 애니메이션 '에반게이론' 덕후를 중심 인물로 한 소설이다.

 오타쿠의 사회적 의미는 굳이 내가 길게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SNS상에서 내가 만난 다양한 덕후들은 단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거부한다기보다는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정의와 윤리를 거부하는 측면이 강했다. 당연히 타인들과의 소통보다는 몰입하는 대상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 대상에 자신을 전이시키거나 일치시키는 경향도 보였다. 외롭구나, 힘들구나, 자신이 없구나, 저 사람들. 내가 본 몇몇으로 일반화하기는 무리이겠으나 내 경험만을 추출한다면 그랬다.

 소설 속 주인공은 환경이 불우하다. 이전 세대처럼 가난을 윤리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세대인 지금의 젊은 세대는 그것을 드러내기를 꺼린다. 계층간 이동마저 점점 자유롭지 못한 사회 속에서 그들은 점점 더 자기 자신 안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몰입하는 대상은 어쩌면 그들에게는 종교 이상의 존재일 수도 있다.

 물론 그들은 대개 비주류이지만 사회부적응자로 분류할 필요는 없다. 현실의 관계에서 받지 못한 위안을 다른 방식으로 얻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들은 항변한다. 좀 쓸모 없으면 어때. 좀 낭비하면 어때. 내가 즐거우면 됐지. 그들의 항변은 어쩌면 마지막 자존심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인간의 행복에 대한 근원적 질문일 수도 있다.

 인물은 자신의 덕질이 무엇을 향한 것이었는지, 스탬프 릴레이를 완주하면서 조금씩 깨닫는다. 종국에 그것이 목적일 수는 없다는, 그저 조금 색다른 위안이라는 깨달음은 소설 속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으나 충분히 보여지고 있다.

 결말에서 오덕들의 대상을 향한 열망을 한데 모여 드러내는 행위는 실은 그들에게도 소통과 관계에 대한 의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방적이지 않게, 폭력적이지 않게. 어쩌면 그들의 가늘고 긴 의지는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방식과 결합될 수도 있겠다. 소설에서는 섣불리 희망이나 교훈을 말하지 않는다. 오덕을 소재로 한 소설다운 결말이었다. 굳이 다시 정리하자면 작가는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내용을 통해 모든 일에 '정답은 없다'는 답을 내린다.

 더불어 에반게리온을 전혀 모르는데도 읽는데 막힘이 없었고 가독성이 좋았다.

 다만 개인의 불행과 사회구조적 문제가 적절히 배치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 한 점 아쉬움으로 남는다. 장강명, 기대되는 작가다.

 사족. 오덕의 심리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해서 화가 났다. 물론 나는 이렇게 쓰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억울하다는 생각, 해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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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모모

땅에 묻힌 전사자를 통해 되살려낸 전쟁의 실상

- 죽은 군대의 장군

 알바니아라는 나라에 대해 알게 된 건 이 작가의 '부서진 사월'이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명예살인이라는, 이슬람 문화의 속성과 알바니아 전통이 결합된 끔찍한 전통을 다룬 소설이었다. 이번 작품은 작가의 첫 작품이라고 하는데 '부서진 사월'과는 달리 알바니아 특유의 문화보다는 전쟁 그 자체를 다뤘다. 즉 보편성이 있는 작품이었다. 재미 있는 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어디와 일어났는지, 과정과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저 막연하게 짐작할 수 있는 장치는 있으나 이 소설에서는 중요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내용은 간단하다. 20년 전(2차 세계대전) 치러진 전쟁에서 수습하지 못한 전사자의 시체를 당시의 적국의 장군이 당시의 적국 속으로 들어가 찾아다니는 내용이다. 전쟁이라는 것이 애국심이라는 무기를 기초로 하여 치러지는 것인만큼 장군은 자국 군대에 대한 자긍심으로 출발한다. 더불어 알바니아인들에 대한 경멸과 적의가 깔려 있다. 시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 전쟁을 통해 죽거나 상처를 입은 이야기를 계속 접하면서 장군은 다른 방식으로 전쟁을 경험한다. 남겨진 자들에게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전쟁은 그 누구의 자랑거리도 아닌, 그저 처참하고 끔찍한 일이었다는 자각도 얻는다.

 파견된 매춘부들도 상처 입고 고통 받았던 전쟁의 피해자였고 화려한 외피를 입은 대령(전사자)은 끔찍한 범죄자였으며 전투력 강하고 야만하다고 생각했던 알바니아인들은 상처 입은 인민이었다. 이런 교훈적인 결말을 위한 여정은 결코 식상하지 않으며 또한 가볍지 않다.

 대령의 아름다운 아내와 장군과 동했했던 신부와의 모종의 혐의(불륜)는 끝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더 이상 파헤치지 말고 남겨두어야 할 이야기였던 것일까. 스캔들은 누구에게나 호기심을 일으킨다. 그것으로 작품을 시작했기 때문에 더더욱. 아쉬웠다는 얘기다.

 시체를 통한 회고라는 형식은 '회고조 소설'의 뛰어난 장치였다고 느낀다.

 더불어 전쟁을 겪은 작가는 인간으로서는 불행하지만 작가로서는 행운이라는 공식이 이 작품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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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모모

2015 제6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1. 건축이냐 혁명이냐(정지돈)

건축(구축으로서의 소설이냐) 혹은 혁명(구성된 역사와 예견된 미래를 거부하는 사건으로서의 소설이냐) - 해설 중

흉내 내기 어려운 소설이다. 방대한 참고자료와 현학이 일정한 틀을 갖추지 않은 채 흐른다. 시대, 역사, 정치, 개인, 예술, 이 모든 것을 건축이라는 총체적 개념으로 접근한다. 결국 실용이냐 예술이냐의 기로에 설 수 밖에 없는 건축의 정체성은 소설의 현재 위치와 닮아 있다. 읽기 힘들었지만, 사실 좀 질리기도 했고 주눅도 들었지만, 글쟁이로서의 고민에 충실한 작품이라 반가웠다.

2. 우리 모두의 정귀보(이장욱)

평범한 사람을 대표하는 이름, 정귀보. 특질이 없는 평범함 속에 깃든 한줄기 개별성, 그것을 위해 쓰는 것인가, 나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 속에서야 형상화되는 정귀보란 이름은 너의 것이고 나의 것이다.

3. 루카(윤이형)

서로의 공통점에 사랑을 느끼고 서로의 차이점에 고통을 느낀다. 동성애의 보편성, 그럼에도 커밍아웃을 한 딸기가 퀴어의 세계 안에서 안주하며 루카를 그 외의 환경에 노출시키기를 두려워하는, 동성애에서만 가능한 방식의 집착을 잘 포착했다. 궁극적으로 희망도 절망도 이야기하지 않는 대신 반성하는 결말이 좋았다.

4. 근린(최은미)

멀지 않으나 절대 좁혀지지 않는 거리, 근린. 설명하지도 않고 구구절절한 사연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죽은 여자가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는다. 그저 척박한 풍경의 하나로 작용하는 인물들. 매력 있다.

5. 조중균의 세계(김금희)

필경사 바틀비가 떠올랐다. 그러나 바틀비와는 달랐다. 조중균은 우스꽝스러웠으나 진지했고 비현실적이나 리얼한 인물이다. 모순 투성이인 이 세계처럼.

6. 임시교사(손보미)

모파상의 비곗덩어리가 떠올랐다. 계급적 차이라는 시스템적 문제 말고도 인간의 이기심과 헛된 희망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7. 여름의 정오(백수린)

다양한 죽음이 있다. 다자이 오사무, 비관 자살, 자살 시도, 체제의 억압에 의한 죽음, 테러에 의한 죽음. 한여름 정오의 뜨거움은 언뜻 정열이지만 죽음에 가까운 고통이기도 하다. 개연성과 논리는 살짝 아쉬웠다.

 

잘 쓴다. 젊은 작가들. 나는 한숨이나 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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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모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