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칼랭,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 이주희 옮김, 문학동네 내가 읽은 책2015. 6. 23. 23:30
존재에 관한 아름답고 파격적인 질문
- 그로칼랭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출간한 첫번째 소설이다. 로맹 가리의 작품을 많이 읽어봤지만 이렇게 파격적이고 아름다운 느낌은 처음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쿠쟁은 그로칼랭이라는 비단뱀을 기르게 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그로칼랭에 투영한다. 그럴 것이 쿠쟁인 다른 사람들의 화법과 사고를 이해하지 못하는 소외된 인물이다. 그는 언뜻 자신의 고독을 즐기는 듯 보인다. 그로칼랭에 대한 집착, 그로칼랭의 먹이로 들였던 흰쥐에 대한 동정심, 태엽을 감아줘야 살아나는 시계 등 자신이 사랑과 관심을 주어야 할 대상을 끊임없이 찾기 때문이다. 쿠쟁의 사랑의 대상은 뒤레퓌스라는 한 여인에게도 향해 있다. 그로칼랭을 들인 것이 그 여인과 같은 지역 출신인 아프리카라는 사실은 쿠쟁에겐 고무적인 일이다. 쿠쟁은 차라리 뒤레퓌스가 인종차별을 심하게 받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자신이 해줄 역할이 있는 것이다. 쿠쟁에겐 불행히도 시절이 이미 너무 많이 지나 있었다. 그러나 뒤레퓌스는 쿠쟁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거절과 무관심조차도 파악하지 못하는 쿠쟁. 선민의식과 반페미니즘이 바탕에 깔려 있다 해도 그런 의식마저 타인에게 위해가 되지 못하는 존재이다. 다만 소설 전반에 계속 나오는 사환의 반정부 투쟁 합류 권유가 쿠쟁의 저항적 내면을 간접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결국 쿠쟁은 뒤레퓌스를 집성촌에서 만난다. 쿠쟁은 뒤레퓌스가 당황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뒤레퓌스는 자신이 하는 일을 즐거워하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 즉. 뒤레퓌스는 쿠쟁의 사랑이나 관심 따윈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후로 쿠쟁은 그로칼랭으로의 변신에 적극적으로 변한다. 두 가지 결말 중 작가가 원한 결말로 판단하건데 쿠쟁은 탈피를 거듭하는 그로칼랭이 숨긴, 결코 다르지 않은 자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관계 속에서는 인간이지만 자기 자신 안에서는 온전한 비단뱀인 것이다. 환상적이고 난해하고 파격적인 결말에 대한 이해는 모두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쿠쟁이 스스로를 비단뱀으로 여긴 것이, 혐오스러운 존재마저도 그저 살아가는 자연이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여겼다.
돋보였던 것 하나는 모순되고 뒤틀린 문장이다. 한 문장 안에서도 그렇지만 연결된 문장에서도 그러하다. 쿠쟁의 의식을 쫓아가는 문장이기에 그것은 쿠쟁의 캐릭터를 반영한다. 매력적이고 놀라운 문장과 사고 구조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로맹 가리의 모든 작품이 수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은 내가 권하고 싶은 작품 목록에 꼭 넣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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