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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18. 17:53

쇼코의 미소 - 최은영, 문학동네 내가 읽은 책2016. 8. 18. 17:53

쇼코의 미소

- 최은영 소설집

 

1. 쇼코의 미소

쇼코와 소유. 이들의 이야기는 특별할 것이 없다. 이 소설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뭔지 한참 고민했다. 상처를 대하는 방식 때문일까. 숨기지 못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 때문일까. 타인의 상처에 진심으로 닿기 위해서는 먼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즉 그만큼의 애정과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당연한 결론 때문일까. 쇼코와 소유의 상처를 품어주는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도 따뜻했다. 쇼코 가정사를 가학적으로 상상해버렸다 뒤통수 맞은 느낌이었다.

 

2. 씬짜오, 씬짜오

정당함과 개인의 상처는 별개의 문제임을. 베트남과 이 나라와의 관계를 두 가족 이야기를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개인의 상처에 도달한다. 상처 입은 자가 먼저 상처 입힌 자(이 도식은 부정확하다)를 감싸주고 이해해주는 관계, 그러나 자신들의 상처 이상의 세계를 구현하기는 어려우 관계. 아픈 소설이었다.

 

3.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시국사건이 소재이지만 초점은 인간의 고통과 관계에 맞춰져 있다. 시대를 통한 불행 모두를 관통당한 순애, 그 순애를 사랑하는만큼 그의 고통에 다가서는 걸 두려워하는 혜옥. 타인의 상처를 가까이서 들여다 본다는 건 그 고통이 전이되는 것마저도 각오해야 되는 일.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만큼 용감하지 못하다. 혜옥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기보다는 이해하고 있는 작가는 인간에 대한 고민이 참 많은 사람이라는 걸 느낀다.

 

4. 한지와 영주

낯선 곳에서 만난 두 이방인, 한지와 영주. 현실의 고통에서 잠시 피하러 온 곳에서 두 사람은 규정되지 않은 애정을 느낀다. 그러나 삶에 대한 의무에서 그들이 벗어날 방법은 없다. 야생의 습성을 간직한 채 야생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 동물이지 인간이 아니다. 사회화라는 건 대부분의 인간에게 생존의 필수 요소이지만 어떤 인간에게는 그저 고통이다. 두 사람이 마음에 들어온 상대를 밀어내는 방식은 달랐다. 떠나기 위해 먼저 떠나보내는 고통을 감내하는 한지를 영주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독자는 이해한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조금 울었다.

 

5. 먼 곳에서 온 노래

아마도 작가 자신의 스토리가 어느 부분에든 들어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시대의 고통에 맞서 저항하던 방식은 시대가 달라지면서 변화를 겪는다. 그러나 어느 시대건 그런 고통을 함께 노래하며 공감하는 것으로 위로를 받는 이들이 결코 적지 않다. 소설은 그런 시대의 변화를 담아내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의 고민들이 너무 직접적으로 그려졌다는 건 작가가 거리두기를 하지 못한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자전을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고통의 시간을 건넌 후에는 또 다른 사랑이 있고 관계가 있다. 

 

6. 미카엘라

세월호에서 목숨을 잃은 학생의 세례명이 미카엘라였나 보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화자를 미카엘라로 설정한다. 세월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지난한 삶을 살아왔지만 언제나 현재형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녀의 엄마, 세월호 유족 부모의 마음을 그렇게 비추고 싶었나 보다. 지는 싸움이라도 해야 하는 이유를 위해 나약했으나 곧았던 아빠를 이물로 설정했나 보다. 결말을 미리 만들어두고 여러 길을 돌아봤을 작가의 모습이 그려진다. 아프다, 이 소설.

 

7. 비밀

할머니는 지민의 죽음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몸이 죽어간다는 걸 안다. 지민의 죽음으로 살아났던 몸이 다시 죽어간다. 그렇게 손녀인 지민의 곁으로 자신의 몸이 가고 있다는 걸 할머니는 모른다. 손녀는 기간제 교사였던 세월호 유족을 모델로 했다. 너무 아파서 읽기가 힘들었다. 세월호는 많은 이들에게 이토록 큰 트라우마다. 세월호 유족 중 학생 외의 인물을 그렸다는 게 고마웠다. 어느 죽음인들 아프지 않을까. 세월호 사건을 다룬 앞의 소설과 이 소설은 비교적 구성이 단순하고 명확하다. 분석을 하기엔 감정이 앞서버려 더 이상은 못하겠다.

 

첫 소설을 읽으며 나는 이 작가가 좋아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소설을 읽기도 전에 이 작가가 좋아져버렸다. 워낙 잘 안 우는 사람이 소설집을 읽으며 세 번이나 울었다. 순하고 선한 서사 안에 인간의 고통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깔려 있었다. 최근 젊은 작가 소설이 영 내게는 채워지지 않는다 여겼는데, 워낙 센 서사 취향임에도 이렇게 순하고 선하고 기교 없는 소설을 쓰는 작가가 너무 좋아져서, 나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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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모모

1. 너무 한낮의 연애(김금희)

짧은 소설이지만 짧게 정리되지 않는 소설이다. 인간의 전형성과 개별성을 모두 갖고 있는 필용과 양희의 연애담이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이야기이다. 작가가 인간을 바라보는 복합적인 시선이 아마도 이렇듯 좋은 캐릭터와 이야기를 만들어냈으리라 짐작한다.

대체가 되는 존재(사물이든 인간이든)가 아니라 아예 사라지더라도 그 존재성을 입증받고 싶은, 그러니까 자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저 부속품처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이들은 이 작품을 읽고 통증을 느꼈으리라. 또한 사랑이라는 감정 또한 입증받고 싶은 감정일 수도 있음을 작가는 예리하게 지적한다.

너무 한낮의 연애라는 제목. 너무 훤히 드러나는 시간의 연애는 그 밝음으로 인해 오히려 상대의 심연을 제대로 보기 어려울 수 있다는, 어쩌면 그런 생각.

답이 딱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너무 좋아서 서글퍼지기까지 하는 그런 작품.

 

2.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기준영)

단편 특유의 짧고 선명한 미학이 돋보인다. 네 명의 인물. 각자 캐릭터를 보면 크게 흥미로울 것도 없다. 게다가 전형적이다. 하지만 관계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생생하게 살아난다. 뻔하디뻔한 그런 관계로 보이는 그들 사이에도 남들에게 숨겨놓은 문이 있고 그 문은 캐릭터에 따라 열려있기도, 잠겨있기도, 아예 녹슬어있기도 하다. 그러나 단면이 아니라 양면이라는 점, 다른 쪽의 두드림은 열고 싶은 이쪽의 마음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선명한데도 울림이 있다.

 

3. 정용준(선릉 산책)

낯익다, 했더니 전에도 단편 하나 읽었던 기억이 있는 작가다. 분명 메모를 해두었겠지만 찾기는 귀찮다. 이 작품은 잘 짜인, 그리고 뻔한 소설이다. 자폐 장애인을 하루 동안 돌보는 아르바이트. 자해 방지를 위한 보호도구는 다른 면에서 그를 학대하는 도구이기도 하다는 걸 알게 된 화자. 선의를 알아챌 줄 알고 미세하고 특별한 감정선이 있다는 것도 알아채는 화자의 선의는 예견된 폭력을 불러온다. 선의만으로, 도덕만으로 다할 수 있는 책임은 없는 것. 화자의 선의는 얄팍하다. 화자가 스스로를 변명하지 않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소서은 딱 그만큼이다.

 

4. 장강명 (알바생 자르기)

제목에서부터 짐작이 가능하다. 권력 대 비권력, 강자 대 약자, 세대간의 갈등. 약자가 선하지도 생각보다 약하지도 않다는 강자의 깨달음은 약자의 모든 행위를 도덕적으로 폄하한다. 그러나 강자들 스스로의 반성과 자각은 없다. 그들은 익숙한 통설에 휘둘리는 이들이고 그대로 행동하는 자들이다. 시스템의 문제는 약자가 먼저 고민하지만 시스템을 교묘하게 활용하는 건 늘 강자다. 선명하면서도 디테일에 숨어있는 악마들을 대동한 대결구도. 장강명스럽다. 그리고 나는 조금 지루했다.

 

5. 유럽식 독서법(김솔)

소설을 위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른 문장이었다. 굳이 장르를 명명하는 건 내 몫은 아니다. 포스트모더니틱한 분위기가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건 사실이더라도. 스토리라인이 분명히 있지만 복합적인 구성으로 이 소설은 특별함을 얻어낸다. 대체 소설은 무엇을 위해, 왜 존재하는가, 에까지 이르지 않은 채 소설의 존재 그 자체를 보여준다. 쉽게 읽히지도, 그렇다고 공부하듯 읽을 필요도 없는 이 작품, 꽤나 매력있다.

 

6. 인터뷰 (최정화)

 속물들의 비루한 자기 과시. 등장 인물은 다섯. 다른 방식으로 그들은 모두 속물이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를 두려워하면서도 자기 과시를 어느 순간에든 잊지 않는다. 군더더기 없이 명확한 소설이다. 그럼에도, 혹은 그래서, 나는 마지막 문장이 아쉬웠다. 비루한 속물의 마지막 자기 과시에 폭력성을 부여하면 어땠을까.

 

7. 새해 (오한기)

작위적 광기. 소설가 소설. 기만적인 구태를 반영한 오래된 거울. 상징은 뻔하고 은유는 역겹다. 작가가 이를 의도했다면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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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모모

여성들이 겪은 전쟁, 여성들이 말하는 전쟁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제2차대전, 독일과 소련의 전쟁에서 전쟁을 겪은 당시의 소련(벨라루스를 중심으로) 여성들의 이야기다.

 

왜 여성들의 이야기만을 담았을까. 읽기 전부터 내가 아는 방식의 전쟁이야기가 아닐 거라는 짐작은 내가 여성이기에 가능했을 수도 있다. 작가는 말한다. 남성들은 전쟁을 이야기할 때 "평범한 온기를 차디찬 광채와 바꾸려는 욕망" 때문에 주로 개인이 사라진 영웅담을 그리거나 타인에게서 들은 정황을 종합하여 거대서사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여성들은 전쟁을 겪은 순수한 '개인'을 이야기할 줄 안다. 그러한 여성의 전쟁은 너무 쉽게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

 

전제되어야 할 것은, 당시는 현재보다 남녀 성역할이 더욱 뚜렷이 구분되어지던 시기였다. 그것이 하나의 가치와 미덕이 되는(현재에도 여전히 그런 시선이 있지만 주로 남성이나 명예남성들에 의해 주도되고 성평등에 대한 인식은 분명히 달라졌다) 시기였고 여성들 스스로도 그에 저항감이 없었다. 더불어 소련은 스탈린 치하의 공산주의 사회였다. 이미 판명되었지만 스탈린은 공산주의를 참칭하여 또 다른 형태의 독재를 했던 자이다.

 

이 책은 내내 전쟁을 겪은 여성의 개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장에서도 삶이 있고 군인들도 감정이 있다. 그들에게는 전쟁이 삶이고 전쟁터가 삶의 터전이다. 그러나 그들의 증언을 읽다보면 그들 하나하나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개별성과 공통성이 명확히 있다는 뜻이다. 전쟁을 치르다 보게 된 꽃의 아름다움, 여성으로서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 같은 여성들과 혹은 남성들과 공유하던 전우애, 여성이 배려받지 못하여 생긴 고통(생리대가 없다거나 군복 미지급, 혹은 너무 큰 군화, 전장에서의 임신 등)들도 다양하다. 쉽게 말하려 들지 않지만 여성이 드문 전장에서 여군들은 남성들에게 성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혹은 반대로 보호의 대상이 되어 부녀 같은 관계, 혹은 연인이 되기도 한다.

 

전쟁은 왜 여성들의 이야기를 배제해 왔을까. 남성들의 것이어야 할 전쟁의 색체에 여성들의 색이 덧입혀지는 걸 남성들은 왜 두려워할까. 그것은 남성우월주의에 기반하고 있지만 실은 여성들이 말하는 진짜 전쟁(진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닐까. 알고 보면 전쟁에서 이렇게 사소한 일을 겪고 사소한 감정을 가졌노라 말하는 것이 남성성에 해가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남성에 비해 적었지만 명백히 전쟁에 참여했던 많은 여성들이 (이 경우만 아니라) 항상 없었던 존재가 되었던 이유에 대해 작가는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들은 전장에서만 전쟁을 겪은 게 아니었다. 남겨져 식솔을 돌보고 전장에서 돌아온 가족을 돌보는 일조차 분명히 전쟁이었다. 가장 안타까운 건 전쟁에서 돌아온 여성들에 대한 대우였다. 남자들이나 할 (못할)짓을 했다는 이유로 그녀들은 비난 받고 소외된다. 전쟁에서 치르는 각종 험한 일이 여자의  몫이 아니라는 깊은 차별주의가 실제 존재하고 있는 여성군인의 존재마저 지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환향녀' 취급을 받기까지 한다.

 

한국전쟁에서의  여성들 역시 지워져있다. 아직도 수면 밖으로 나오지 않는 그들의 존재. 이 책의 서술자들처럼 그들은 그 모든  진실을 가슴에 품고 자신들을 잊지 않고 비난하지 않고, 그 진실을 마주해줄 사람을 찾고 있지 않을까.

 

여성을 주제로 한 책을 읽다 보면 어느 나라의 책에서나 공감이 어렵지 않다. 겪은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쓴 작가가 노벨상을 받았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래도 세계는, 문학은, 아주 조금씩 진보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작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어내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이야기를 꾸미고 바꾸고 새로 배치하고 재미있고 흥미있고 감동적으로, 이런 일련의 과정이 그녀들의 진실을 왜곡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으리라. 읽는 내내 고통스러웠지만 잘 읽혔다. 그리고 한 번쯤 읽어봐야 하는 책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여성으로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이 더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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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모모

슬픈 열대

 

- 어느 민속학자의 원주민 들여다보기

 

누군가의  추천을 받고 오랫동안 책장에 방치해 둔 책이었다. 두께와 한길사라는 무게감에 짓눌렸던 듯하다. 막상 여행기에 가까운 책이었다. 물론 평범한 여행기는 아니다. 원시성을 간직한 브라질의 원시부족 네 개에 대한 관찰기가 이 책에선 가장 유효하기 때문이다.

 

나는 레비 스트로스도, 구조주의도 알지 못했다. 책의 서문에 나온 철학자로서의 레비 스트로스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구조주의에 대한 설명이 너무 간단해서인지, 아니면 레비 스트로스의 철학 자체가 빈곤했던 것인지, 그마저도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서문에서조차 레비 스트로스의 사상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 부분에 대한 심도 있는 설명이 부족했다.

 

여행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라 내내 지루하게 책장을 넘기다 5~8장까지, 즉 원주민 네 부족에 대한 특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한 부분에서는 특별한 흥미를 느꼈다. 방송에서 원시부족 관찰 다큐는 이제 흔하다. 다만 그 작위성에 대한 논란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보고자 하는 대로 보기 위해, 혹은 보여주고 싶은 대로 보여주기 위해 조작하는 다큐멘터리가 많다는 이야기이다. 그에 반해 이 책의 관찰기는(이 역시 내 자의적 판단이지만) 실제에 입각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민속학자 역시 보고 싶은대로 봤다는 혐의를 지울 수는 없다. 더 원시적인 부족 내의 어떤 질서. 문명화 된 서구인의 입장에서는 야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그 나름의 민주주의와 합리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원시성에 더 가까운 부족을 더 자연에 가까운 순수로 보고 문명에 가까워진 부족에 대해 야만성이 더 드러나는 것으로 단순 이원화 한 데서 레비 스트로스는 자신의 불합리한 구조주의에 무게를 실으려 든 것 같다.

 

이슬람, 불교, 기독교에 대한 이 민속학자의 입장은 더욱 명확하다. 인도의 이슬람이 주고 있는 불합리와 불편에 대해 후발종교로서의 억척스러움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의 시작이라는 것 자체가 임의로 결정할 수 있지 않을 텐데 레비는 이슬람의 출현을 무하메드로부터 삼고 있으며 서구인들이 흔히 하는 비난으로 무하메드를 깎아내린다. 종교가 어떤 방식으로 인간을 억압하는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급하게 일반화 하는 점에서 레비는 철학자로서는 상당히 의심스럽다.

 

다행히 이 책을 재미 있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원시부족에 대한 관찰부분이 나의 글쓰기에 모티베이션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단지 글에 이용한다기보다는 내가 이전에 썼다 묻어둔 작품의 소재였고 내가 흥미로워하는 소재였다.

 

어렵지 않다. 하지만 재미는 취향에 따라 매우 다를 것 같다. 여행기 좋아하는 분들에겐 신선할 것도 같고. 추천은 못하겠다.

 

 

문득 떠올랐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아메리카 인디언이 학살 당한 과정을 그린 책이다. 무거우면서도 잘 읽혔다. 물론 슬픈 열대와는 전연 다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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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모모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 앨리스 먼로

 

1.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스토리는 매우 단선적이고 명확하다. 그 안에 깃든 인간의 인간을 향한 감정도 매우 평이하다. 다만 '운명적 만남'의 기저엔 수많은 우연, 혹은 의도치 않은 실수, 그도 아니면 누군가의 장난질이 있을 수도 있다는 조금은 블랙코메디 같은 단편. 새비스와 이디스, 두 친구가 삶을 받아들이는 완전히  다른 방식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만하다. 보여주기 방식이었지만 작가는 그들이 가진 기질적 특성에 더 중점을 둔 듯한데 환경적 특성과의 상호적 관계를 복합적으로 나타냈다면 좋았을까 아님 소설이 지저분해졌을까.

 

2. 물 위의 다리

롱테이크 독립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다. 병명은 나오지 않지만 심각한 병에 걸린 지니의 심리 묘사로 진행이 된다. 일어나는 일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굳이 옮길 필요는 없는 듯하다. 그러나 마지막에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 지니를 물 위의 다리로 인도한다. 지니에겐 처음 겪어보는 신선함. 그러나 모든 일은 살아가면서 수없이 반복될 것이라는 지니의 말. 지니 역시 병이 호전됨에 따라 치료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두려움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

 

3. 어머니의 가구

다 안다고 생각하는 이의 속사정, 숨겨진 이야기들. 진부하게만 치부되는, 어머니가 물려준 가구 같은 이야기 속엔 남들과는 다른 이야기성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결국 남의 이야기.

 

4. 위안

자기확신이 가득한 고지식한 남편은 루게릭병이 진행되자 음독자살을 한다. 적극적 관찰자인 아내 니나의 시점으로 소설이 진행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제목이 왜 '위안'일까. 니나는 남편의 죽음을 알아채자마자 남편이 남긴 유서나 메모를 찾기 시작한다. 소설 말미에 찾게 된 마지막 남편의 메모는 현실조롱이 가득한 시 몇 줄이 전부이다. 그렇다면  니나는 무엇으로부터 위안을 받았을까. 남편 몰래 만나고 있던 남자와의 관계 발전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떠오르지만 소설 속에서는 그 어떤 징표도 보이지 않는다. 남편의 뜻에 따라 손님을 맞지 않고 화장을 치뤄 남은 재를 뿌리는 니나, 생생한 삶의 감각을 느낀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위안이다.

 

5. 쐐기풀

고통을 공유한 연대의 관계, 같은 상처를 입고 같이 치유해가는 과정. 그것이 부부라는 흔한 유형일지라도 특별함이 약해지는 건 아니다. 너무 전형적인 이야기임에도 어릴 적 부분의 이야기는 인상 깊다. 채 열 살이 되지 않은 아이들의 성애적 관념. 그것이 성장 후까지도, 적어도 이 소설에서는 사는 내내 기억될 소중한 경험이고 추억이기도 하다.

 

6. 포스트앤드빔

견고하고 독보적인 건축양식(포스트앤드빔)으로 지어진 집에 사는 로너. 지키는 게 익숙한 사람. 그 와중에 타인에 대해서는 도발적인 상상을 하지만 자신의 문제가 되었을 때는 역시 지키는 방향을 고민. 그러한 보수성은 때론 폭력적(시선과 태도) 성향을 띠기도 함.

 

7. 기억

기억의 작위성에 대해 그린 소설이다. 단 한 번의, 돌발적이고 뜨거웠던 부정에 대한 기억을 사는 내내 간직하고 살았던 메리얼. 그것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 키스를 거절했던 상대의 냉정함에 대한 기억은 오랜 시간 억압된다. 투르게네프 소설을 인용하여, 그 냉정함은 이후에 벌어질 불리한 결과를 미리 차단하는 영리함이었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8. 퀴니

전형적인 캐릭터, 퀴니. 돌발적이고 즉흥적이며 감정적인, 화려하고 천박한 꾸밈과 한없는 긍정형의 인물. 그런 인물은 사실 어디에나 있다. 자신이 살아가는 법을 너무 잘 알고 있는 퀴니. 그런 인물을 구제하려던 화자의 오만함도 드러난다.

 

9. 곰이 산을 넘어오다

-기억하지 않는 사랑

이 단편은 언젠가 영화로 본 적이 있다. 정확히 같은 내용의 영화 제목을 떠올리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요양원에 맡기고 살뜰히 방문하여 보살피는 남편. 그러나 아내는 요양원 아내서 남자친구를 만들고 남편은 잊은 듯 군다. 남자친구가 떠난 뒤 아내는 병이 나기에 이른다. 남편은 그 남자친구의 아내를 찾아가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자고 부탁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돈)로 거절 당한다. 남자친구의 아내는 이 남편에게 만남을 제의한다. 남편은 아내를 다시 찾아간다. 아내는 남편을(요양원에 간 이후 처음으로) 반갑게 맞이한다.

내용은 이게 다이다. 그러나 이 소설 안에는 많은 디테일이 숨어있다.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살았던 아내가 치매에 걸린 이후 처음으로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주는 것. 이것은 억눌린 욕망의 발현일 수도 있고 남편 없이 지내야 하는 요양원에서-비록 치매에 걸렸지만-자신이 살아갈 최적의 방법을 찾는 생명력일 수도 있다. 남겨진 두 사람의 관계는 열린 결말이다. 노년의 체인징파트너. 다소 자극적인 소재임에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일이다.

영화의 제목은 '어웨이 프롬 허', 잔 서사들 잘라내고 중심서사를 롱테이크로 잘 만들어냈다.

 

두 번째 앨리스 먼로 작품집. 내 취향은 아니다. 한국의 전쟁 이후 같은 스산함과 차별적 행태들에 작가는 맞서지 않는다. 도리스 레싱 류의 날카로움도 아니다. 다만 삶의 과정을 오래 관조한 여성의 입장에서 그려낸 많은 단편들은 어쩌면 내가 더 나이를 먹어서 읽으면 다르게 느낄 수 있을까.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지 부부 지간에 높임법을 다르게 쓴 번역도 거슬렸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지 않는 번역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전에 읽었던 것보단 이번 작품집이 낫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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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모모

진실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 '평범함'에 귀속하고자 하는 욕망

- 휴먼 스테인

 

 주인공 콜먼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소설에 대해 내가 느끼는 바를 정리하기 쉽지 않을 듯하다. 콜먼은 소위 성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권과 욕망으로 인한 오해로 인해 대학의 학과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이후 문맹의 불행한 젊은 여성인  팔리와 연인이 된다. 흑인 태생이고 흑인으로 살아갔던 거의 흰 피부(여기서 한 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의 콜먼은 성장 후 흑인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차별, 불리함, 혐오 등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흰 피부를 이용해 백인(그 중에서도 유태인)으로서의 삶으로 철저하게 위장한다. 백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콜먼이 바라는 '평범함'이었던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의 그러한 선택은 비난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충분히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오해를 샀던 부분이 인종차별이었다는 데에 삶이라는 불가해한 농담이 깔려 있다. 설명할 수 없는 콜먼의 분노는 사회적 질서나 도덕보다는 자연의 질서에 더 부합한 인물인 팔리를 통해 해소된다. 해소된다는 술어는 어쩌면 오류일 수도  있다. 극복된다, 치유된다, 넘어선다, 등등 한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해석이 가능한 콜먼의 변화는 그만큼 양상이 복잡하다. 자신의 태생과 과거를 부정하면서까지 백인으로서 사회에 안착하고자 했던 콜먼의 '평범'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저 생긴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사는 삶의 행복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팔리에 대한 콜먼의 사랑도 큰 역할을 했지만 팔리 같은 인물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끌어낼 수 있는, 인간의 혁신적인 변화였다.

 

콜먼을 둘러싼 오해들을 보면 'spooks'라는 단어로 인한 의도적 모함은 그렇다 쳐도 콜먼이라는 사람됨을 아는 이들조차 선정적 이슈와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오해의 방향을 수정할 생각이 없다. 진실에 접근하는 인간들의 태도는 이 소설 속에서 보여주는 다양하고도 뻔한 인물들을 넘어설 수 없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물론 화자인 네이선만큼은 진실을 향해 애를 쓰지만 그조차도 주장일 뿐 타인에 대한 진정한 이해라는 건 도대체가 불가능해 보인다.

 

팔리의 전남편인 레스터는 베트남 참전 군인으로 외상후장애를 앓고 있다. 국가는 그들을 방치했고 그들의 병은 더 약한 자인 전처(팔리)를 향한다. 불합리한 구조와 불행한 개인이 결합된 최악의 인물인 레스터, 그러나 그를 구하고자 하는, 같은 상처를 겪었고 인간으로 인해 극복한 구원자가 있다. 국가는 그들을 소모품으로 여기며 적어도 이 소설에서는 더 나은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분명히 구원의 희망이다, 비록 실패할 지라도.

 

이 소설을 통틀어 가장 불행해 보이는 인물, 루. 콜먼과 같은 대학에 근무하며 콜먼을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도 파악하지 못하여 그를 가장 비참한 상황에 빠뜨리는 프랑스 출신의 여성이다. 개인을 존중하지 않고 가문의 정통성만을 강요하는 유럽의 상류층 계급에서 벗어나고자 미국으로 왔지만 결국 인정욕구를 저버리지도 못하고 스스로의 감정조차도 알아챌 수 없는 감정장애자이다. 다만 작가가 그녀를 그렇게 무분별하고 사이코 같은 얼뜨기 페미니스트로 그려야 했을까, 에 대해 나는 끝끝내 실망을 감출 수 없다. 그녀 자신은 페미니스트라 여기지만 그녀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명예남성으로 여긴다. 지나치게 거리를 둔 너무나 짧은 설명 외에 작가가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를 굳이 해소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데에, 필립 로스를 좋아하기에 더욱, 안타깝고 속상함 이상의 실망이 깃든 것이다. 콜먼을 해치기 위해 거대한 음모 같은 건 없어도 좋았겠지만 남녀의 애정 문제와 여성주의를 배치한 건 분명 안일했다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 해서 이 소설 전체를 폄하할 수는 없겠다. 다만 아직 생존해 있는 필립 로스가 여성에 대해 조금 더 나은 관점을 보여주길, 나는 여전히 기대한다.

 

한 장, 한 줄이 아까울 정도로 재미도 있고 생각할 거리가 많은 소설이었다. 미국의 목가와는 사뭇 다른, 그러나 필립 로스의 필력이 잘 펼쳐진 소설이었다.

 

읽으면서 너무나 많은 생각이  들었고 여기다 쓸 말이 많았는데 어디로 새버렸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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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모모

욕망과 타락의 풍경화

- 나나

이 소설에 관해 나는 할 말이 아주 많다. 글을 엮듯 독서 후기를 남기는 게 아니라 제대로 써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불행한 환경, 타고난 천박한 성정, 아름다운 몸, 절제를 모르는 욕망, 나나라는 인물에 대한 짧은 설명이다. 그런 나나를 둘러싼 또 다른 욕망과 타락과 무절제들이 끝없이 펼치진다. 첫 챕터부터 예견되는 비극적인 결말을 별개로 하더라도 이 소설은 그런 타락의 무절제한 나열 이상의 무엇이라 할 수 있는지 많은 고민을 했다.

배우인 그녀는 연기가 아니라 몸의 관능미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그 몸을 탐하는 남성들. 너무나 당연한 구도이다. 자신의 욕망 앞에 무너지고 파산하는 남성들은 이 소설에서 당연한 조연들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욕망은 무엇인가. 나는 이 점이 잘 정리되지 않았다. 소설 초반에는 '마담 보바리'의 그것과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양상을 보이기도 하고 작가의 스타일에 따라 다르게 그려진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이 소설을 마담 보바리와 비교하는 건 무용한 일이라는 걸 곧 깨닫고 말았다.

나나는 물적, 성적 욕망 그 자체이다. 문제는 그것만으로도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퐁탕이라는 인물을 제외하면 나나는 남성들을 자신의 소도구로 여기며 지배하려는, 물론 그들의 탐욕을 역이용하여, 비이성적 권력자의 형상으로도 나타난다. 그러나 일반적인 권력자와 달리 나나는 즉물적이고 즉흥적이다. 그 권력을 제대로 휘두르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순간적 욕망을 채우려는 데에만 쓴다. 나나의 욕망은 채워질 수도 없고 나나의 삶은 이어질 수도 없다. 그것은 나나의 육체가 남성들에게 욕망을 일으키는 한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의 쾌락만을 위한 삶이라고 보기에 또 이 소설에 배치된 두 인물이 흥미롭다. 과거 남성의 탐욕을 이용해 귀부인처럼 늙어가는 인물, 망가지고 썩어가는 부랑아인 인물. 두 인물을 보며 나나는 분명 자신의 미래를 그리고 있지만 미래를 위한 어떠한 계획도 자제도 이 소설에서는 그려지지 않는불다.

가장 일관성 없이 보였던 건 바로 퐁탕과의 관계이다. 희극적 외모를 가진데다 돈도 없고 폭력을 난무하는 그에게 나나는 계속 애정을 갈구한다. 그것만 봤을 때 나나는 지배를 받고 싶어하는 기질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을 해설에서는 나나의 순수함이라고 했다. 순수함이라니. 여성의, 창녀의 순수함은 그토록 미련하게 모든 상황을 감내하는 형태로 그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인물의 캐릭터는 스토리와 함께 변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나라는 인물은 변화가 없다. 그저 대책 없이 자신의 감정에만 몰두하는 인물이다. 그렇다 하더라고 소설 전반에 걸쳐 일관성은 물론 개연성도 느낄 수 없는 인물을 지켜보는 건 내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나나 뿐만이 아니다. 이 소설에서의 모든 인물은 작가가 드러내고 싶은 세계에 대한 보조적 장치일 뿐이다. 다시 말해 인간에 대한 깊은 탐색과 이해가 없다는 의미다.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한 소도구로서의 인물로 그려진 소설이라니. 내겐 반발심이 들 수밖에. 인물도 그러할진데 스토리는 자극적이기만 하고 구성은 성기며 결말은 너무나 뻔하다.

차라리 성에 대한 욕망을 자세히 묘사했으면 나았을까. 이 모든 인물을 권력관계로 그렸다면 달랐을까.

소위 대작을 읽고 이렇게 짜증이 나보긴 처음인 듯하다. 설명 없이 상황을 보여주기만 하는 소설도 있지만 이 소설은 무책임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오래 전 읽었던 목로주점은 불편했지만 이렇게 불쾌하지는 않았던 기억이 있다.

또 하나, 이 소설은 현대성에서도 낙제점이다. 여성을 순수와 창녀의 이분법으로 나누어, 여성에 대한 탐색도 없이 대상화 시킨 점 때문이다. 고전 소설에서 이런 구도는 흔하기에 감안하고 보긴 하지만 이  소설은 그 중 최악이다.

물론 에밀 졸라의 시대적 역할에 대해서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대가의 소설은 더 이상 읽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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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모모

코끼리에 관한 아주 특별한 고찰

- 하늘의 뿌리

이 소설의 키워드는 단연코 '코끼리'이다. 이 소설에서 코끼리는 구체적 대상이기도 하지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가치이기도 하다. 코끼리를 지키려는 인간, 코끼리 따위 안중에 없는 인간, 코끼리를 해치려는 인간 등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이 소설 내의 '코끼리'가 갖고 있는 의미를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그에 동의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고민을 치열하게 따라가야만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분량도 많지만) 읽기가 쉽지 않다.

강제수용소에서 절망하지 않고 견디어 내는 방법으로 모렐은 코끼리가 뛰어다니는 아프리카 대륙을 상상한다. 너무 큰 몸집이지만 제약 없이 풀을 뜯고 물을 마시고 이동을 하는 코끼리는 어쩌면 자유의 상징이다. 억압된 처지에서 그런 자유를 상상하는 것은 로망이고 희망이고 판타지이다. 그 모든 것은 굳이 대상을 특정화할 필요 없는 '존엄'으로 귀결된다. 모렐에게 코끼리가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할 대상이었던 이유다. 코끼리는 생물이고 자연이고 가치였던 것이다.

물론 코끼리는 구체적 대상으로서 고기를 위해 원주민에게 사살 당하기도 하고 상아를 위해 이주민에게 살육되기도 하며 단지 폭력의 쾌감을 위해 사냥꾼에게 학살당하기도 한다. 원주민도 이주민도 사냥꾼도, 한 개인으로서의 연민을 둘 가치는 있으나 모든 방향성이 존엄을 위한 가치로 가야 하는 당위성을 이 소설 속 몇몇 인물들은 내내-주변의 비아냥에도 불구하고-주장한다.

모렐의 정신과 가장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미나. 전쟁을 겪었고 모렐 이상의 고통을 겪었던 미나는 접대부였던 과거와 지적이지 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장 많은 오해를 사고 있다. 어쩌면 미나는 또 다른 '코끼리'다. 그저 덩치 큰 애물단지처럼 대상화로서만 존재해 온 수많은 약자들의 표상이다. 그런 미나가 영웅화 된 모렐처럼 고결한 가치를 추구한다는 걸 대부분의 인물들은 믿지 않는다. 코끼리를 지키고 자연을 지키는 일이 바로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는 일이라는 걸 믿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많은 분량만큼 많은 인물과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런 순수한 가치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 그것을 이용하여 제 이익에 보태려는 사람들, 그런 고결함을 견디지 못해 공격을 하는 사람들. 그런 다양한 양상을 매우 복잡하게 얽어놓았으나 큰 줄기를 따라 가면서 읽다 보면 그것들은 모두 욕망에 눈이 어두워진 흔하고 흔한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재밌는 소설은 아니다. 로맹가리 소설 중 상당히 규모가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소설이 너무나 좋다. 눈에 보이는 가치 외에도 우리가 꿈꾸는 수많은 꿈과 가치의 위대함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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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모모

또 하나의 계급, 인종

-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

미국의 노예해방 이후의 인종 문제를 다룬 이 소설은 자서전 형식을 빌린 흑백 혼혈인의 이야기이다. 피부색만으로 우월감을 가지는 백인의 순혈주의가 새삼스럽지는 않다. 다만 거의 백인으로 여겨지는 혼혈인이 겪는 갈등은 근간을 흑인에 두고 있다는 점, 즉 그러한 정체성의 혼란조차도 약자의 포지션에서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주인공은 교육 받았고 다방면에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다. 그리하여 흑인으로서의 불우한 환경을 모태로 삼지는 않는다. 주인공이 경험할 수 있었던 다양한 세상은 어떤 면에서는 중산층 이상의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를 따라다니는 흑인의 피는 스스로 인종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남부와 북부가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던 당시, 북부는 흑인 문제에 대해 지적이고 추상적인 태도를 취하는 반면 남부는 낭만적이고 구체적인 태도를 취한다. 북부는 흑인 문제에 올바르게 대응하려는 경향이 강하지만 흑인을 그들의 삶 속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더디다. 남부는 차별적이고 야만적인 경향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개별적인 태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것이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가의 문제에 답을 내놓기보다 주인공은 환경으로 인한 입장의 차이를 발견한다.

실력과 행운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 주인공은 결국 자신의 정체성 문제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남부로 돌아간다. 그 와중에 보게 된 끔찍한 장면-죄 지은 흑인을 어떤 판결도 없이 불에 태워죽이는-을 보고 주인공은 스스로를 속이며 백인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사람으로 취급 받지 못하는 사람에 자신이 속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타협이 아닌 패배를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주인공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았다는 점, 모든 걸 개인의 경험에 한정했다는 점이 한계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주인공이 느낀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지는 않다.

경제적 차이에 따라 흑인들 간에도 계층이 나뉘고 오히려 흑인이 흑인에게 더 가혹한 잣대를 들이미는 것, 이것은 단지 흑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사회적 강자-백인-에 두려는 모습은 일견 비겁하지만 사실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인간의 욕망이다. 인종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회적 편견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어느 집단에 대입해도 되는 그러한 보편성이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라 여겨진다.

자서전 형식이다 보니 주인공의 개인적 체험으로만 여겨질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았고 사변도 적지 않았다. 더불어 지나친 낭만성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었던 건 어떤 한 개인을 통해 사회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전형적이지 않은 결말은, 다소 씁쓸했지만, 진짜 자서전처럼 보이는 효과도 있었다.

다소 정밀하지 못한 점에도 불구하고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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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모모

하층계급을 통해 보여주는 인간의 적나라한 욕망

- 말라볼리아가의 사람들

서문을 읽고서야 알게 되었지만 이 작품은 작가가 구상한 다양한 계층의 욕망 중 하층 계급의 그것을 그린 작품이다. 해설에서는 '진실주의'라 표현된 매우 건조한 리얼리즘 소설이다. 나는 이 작품이 매우 읽기 힘들었다.

이탈리아의 작은 어촌을 배경으로 매우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삶의 형상을 굳이 각색하지 않는다. 물론 작가를 통한 재구성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서사의 진행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이라는 뜻이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로망 따위는 이 작품에 끼어들 틈이 없다. 아마도 계층을 막론하고 인간이 가진 욕망이 얼마나 비열하게 드러나는지 작가는 그리고 싶었을 것이고 그 와중에 하층 계급의 욕망은 더욱 직접적이고 또 우스꽝스럽다.

그들의 욕망은 애정과 돈, 두 가지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조건은 궁핍한 그들에게는 당연히 돈에 대한 욕망으로 드러나고 애정조차도 돈을 경유해야만 완성이 된다. 흥미로운 서사가 큰 줄기를 가지고 진행되는 게 아니라 많은 등장인물만큼 파편화되어 어느 순간 길을 잃게 된다. 그러나 서사를 따라가는 게 어느 순간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는다. 주요 인물 몇 명 외에는 그들이 보여주는 삶의 방식만으로도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렵다기보다는 안 읽히는 책이라는 게 더 정확한 이 소설이 작가의 의도대로 계층별로의 단일한 작품으로 완성됐다면 나는 욕심을 부렸을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이 소설을 다 읽기까지 상당한 인내가 필요했던 건 사실이다.

사정이 있어 중간에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 몇 개를 읽었다. 그 중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정유정의 '28년'은 굳이 후기를 올리지 않기로 한다. 앞으론 블로그에 조금 더 신경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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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모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