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지대 - 줌파 라히리, 서창렬 옮김, 마음산책 내가 읽은 책2015. 12. 22. 12:42
고통이 모이는 곳, 저지대
- 저지대
줌파 라히리의 단편집을 읽고 두 번째 접하는 작품이다. 해외의 여성작가를 접하기 쉽지 않은만큼 주목하고 있던 작가이기도 하다. 예상과 달리 장편이었고 이 작품은 두 번째 장편소설이라 한다.
인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많이 접해보지 않아서인지 식민지와 격변기를 아우르는 시대적 배경에 긴장을 했는데 오히려 우리나라와 공통점이 많아 친숙하게 느껴졌다. 이 소설을 내내 관통하고 있는 인도의 한 지역의 저지대는 주택가를 가르는 두 연못이 만나는 곳이다. 우기엔 저지대에서 두 연못이 합쳐지고 온갖 쓰레기들이 범람한다. 건기엔 가난한 그 동네의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다. 그렇게 아픔과 고통과 삶이 어떤 방식으로든 모여드는 낮은 지대. 그러나 소설의 반 이상은 미국이 배경이다. 다만 인도인이 주인공이다. 인도에서 영향을 받았고 인도의 관습을 익히 알고 있고 인도의 정서를 가지고 있으나 벗어나고 싶은 곳으로 인식되는 인도. 미국인의 입장에서 본 인도인이 아니라 인도인의 입장에서 디아스포라로 살아가고 있는 소설이다. 워낙 방대한 소설이라 배경이나 스토리를 압축하는 게 쉽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의 인물을 중심으로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형제인 수바시와 우다얀. 고지식하고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수바시, 도전적이고 세태에 휩쓸리는 우다얀. 두 형제 이야기에서 나는 성경의 카인과 아벨을 떠올렸다. 다소 변형적인 캐릭터이긴 하지만 부모는 아벨을 더 사랑한다.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활달한 성격인 우다얀은 부모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캐릭터다. 수바시는 그런 우다얀을 선망한다. 선망과 질투는 미묘한 차이지만 이 소설에서 극심한 질투의 서사는 분명히 없다. 그러나 격정적인 우다얀은 너무 쉽게 죽게 되고 임신한 미망인 가우리를 수바시는 아내로 맞이한다. 부모의 역살이 가우리로 뒤바뀐 것이다. 가우리는 우다얀을 사랑했지만 대의라는 명분 하에 인간적인 책임에 소홀했던 우다얀에게 쉽게 정을 뗀다. 그렇다고 수바시에게 마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자라난 배경이 독립적이었기도 했지만 원체의 성격이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며 사랑을 주고받는 데에 익숙하지 않다.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답게 수바시는 그런 가우리를 기다리고 동생의 아이인 벨라의 양육에 힘을 쏟지만 결국 가우리는 두 번째 남편도, 자식도, 그리고 과거와도 결별하여 독립된 삶을 살아간다. 그로 인해 고통 받았던 벨라는 끝까지 엄마인 가우리를 용서하지 않지만 화해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전반적으로 이 소설에서 받은 인상은 편안하다는 것이었다. 정서적으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고 에피소드는 그다지 편하게 읽히지 않았음에도 기저에 깔린 작가의 생각이 어쩌면 수바시처럼 고지식하고 안정적인 건 아닐까, 생각했다. 전에 읽었던 단편집을 돌아봐도 동양적 사고에 영향을 받은 작가는 미국의 상업적 가족이데올로기와는 다른, 동양의 정서적 가족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인도에서 시부모와 우다얀과 살 때 전형적으로 동양적 시집살이를 하는 가우리의 심정, 미국에서 수바시와 살면서도 가사와 육아를 더 책임져야 하는 현실, 굳이 대단한 목표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성취욕이 중요한 가우리로서는 답답하고 불합리하게 느껴질 만하지 않을까. 내 입장에 기대지 않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삷보다 여성으로서의 삶을 더 당연하게 생각하라는 강요에 반발심을 느끼는 건 그만큼 가우리가 주체적인 인간이어서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주체성보다는 이기심 위주로 가우리가 그려진 데에 나는 다소 불만이 생겼다. 도망쳐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도망치지 않고 그 문제가 해결되려면 가우리의 전기처럼 소설을 써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성 작가가 여성의 주체성에 대한 인식이 미비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대신 벨라에 대해서는 모두가 수긍할 주체적 인물형으로 그려놓는다. 그것이 수바시의 존중과 어미 부재의 상처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 다소 안타깝기는 하다. 벨라가 미국에서 살면서 미국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부분은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적 정서를 최상으로 놓고 말하는 건 아니다)
이런 개인적인 아쉬움은 있지만 이 소설은 분명 좋은 소설이다. 쉽게 읽히지도, 그렇다고 책장이 넘어가지 않지도 않는다. 인물 하나하나에 공감이 가고 소설에서 그려진 긴 시간의 이야기가 하나의 큰 그림으로 그려진다. 문장에는 과장이 없으며 독자를 함부로 설득하려 들지도 않는다.
인상 깊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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