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 - 제임스 웰든 존슨, 천승걸 옮김, 문학동네 내가 읽은 책2016. 3. 3. 15:40
또 하나의 계급, 인종
-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
미국의 노예해방 이후의 인종 문제를 다룬 이 소설은 자서전 형식을 빌린 흑백 혼혈인의 이야기이다. 피부색만으로 우월감을 가지는 백인의 순혈주의가 새삼스럽지는 않다. 다만 거의 백인으로 여겨지는 혼혈인이 겪는 갈등은 근간을 흑인에 두고 있다는 점, 즉 그러한 정체성의 혼란조차도 약자의 포지션에서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주인공은 교육 받았고 다방면에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다. 그리하여 흑인으로서의 불우한 환경을 모태로 삼지는 않는다. 주인공이 경험할 수 있었던 다양한 세상은 어떤 면에서는 중산층 이상의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를 따라다니는 흑인의 피는 스스로 인종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남부와 북부가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던 당시, 북부는 흑인 문제에 대해 지적이고 추상적인 태도를 취하는 반면 남부는 낭만적이고 구체적인 태도를 취한다. 북부는 흑인 문제에 올바르게 대응하려는 경향이 강하지만 흑인을 그들의 삶 속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더디다. 남부는 차별적이고 야만적인 경향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개별적인 태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것이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가의 문제에 답을 내놓기보다 주인공은 환경으로 인한 입장의 차이를 발견한다.
실력과 행운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 주인공은 결국 자신의 정체성 문제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남부로 돌아간다. 그 와중에 보게 된 끔찍한 장면-죄 지은 흑인을 어떤 판결도 없이 불에 태워죽이는-을 보고 주인공은 스스로를 속이며 백인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사람으로 취급 받지 못하는 사람에 자신이 속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타협이 아닌 패배를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주인공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았다는 점, 모든 걸 개인의 경험에 한정했다는 점이 한계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주인공이 느낀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지는 않다.
경제적 차이에 따라 흑인들 간에도 계층이 나뉘고 오히려 흑인이 흑인에게 더 가혹한 잣대를 들이미는 것, 이것은 단지 흑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사회적 강자-백인-에 두려는 모습은 일견 비겁하지만 사실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인간의 욕망이다. 인종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회적 편견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어느 집단에 대입해도 되는 그러한 보편성이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라 여겨진다.
자서전 형식이다 보니 주인공의 개인적 체험으로만 여겨질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았고 사변도 적지 않았다. 더불어 지나친 낭만성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었던 건 어떤 한 개인을 통해 사회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전형적이지 않은 결말은, 다소 씁쓸했지만, 진짜 자서전처럼 보이는 효과도 있었다.
다소 정밀하지 못한 점에도 불구하고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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