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걸음 - 모옌, 임흥빈 옮김, 문학동네 내가 읽은 책2018. 1. 23. 17:14
짙은 안개 속의 척박한 땅덩어리, 중국
- 열세 걸음
제목은 러시아의 참새에 관한 설화에서 따온 것이다. 참새의 걸음 수에 따라 온갖 행운이 따라오지만 열세 걸음에는 극악한 불행이 몰려든다는.
소설은 그렇게 열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열두 장이 그렇다고 모두 행복한 이야기는 아니다. 누군가에겐 행운이고 누군가에겐 불행인, 그렇게 얽히고설킨 이야기들이 진행될 뿐이며 마지막 열세 걸음에서는 그 이야기의 씁쓸한 마무리가 지어진다.
이야기성이 풍부해 매우 재미 있지만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시점과 시간 배열이 뒤섞여 있고 리얼리즘과 판타지가 뒤섞여 있는데다 사회주의 시대의 중국의 사회상에 대한 패러디가 곳곳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굳이 따져보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들이 리얼리즘의 법칙에 따르지 않고 진행되고 있으니 엄밀하게 알레고리도 판타지도 아니다. 그럼에도 내 생각에 이 소설은 알레고리 장르에 가장 가까운 듯하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일반적인 자본주의 사회와 크게 다를 게 없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확실히 다르다. 작가의 의도는 사회 속에서 주체성을 잃은 개인들과 그들의 욕망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확실히 내 눈에는 차이점이 눈에 띤다. 예를 들면 과부의 정사를 옹호하는 장면 같은 것들. 사회적 이익(물론 그럴싸한 명분일 뿐일 때가 더 많지만)을 위한 논의의 장. 육체노동을 정신노동에 비해 가볍게 보지 않는 풍조. 그러한 것들은 작가의 관점과 달리(실질적 측면에서는 모순이 있다는 걸 인정하더라도) 미래지향적인 측면이 아닐까.
작가의 여성혐오적 태도는 극히 심각하다. 강간 당한 여성이 성욕에 휩싸이고 가해자를 찾는다거나, 여자를 생물학적 암컷으로만 취급한다거나, 여성을 악의 근원으로(창녀론) 본다거나 하는.
그럼에도 이 소설은 걸작이다. 어려운데 막히지 않고, 재밌는데 우습지 않다. 비현실적이지만 현재를 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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