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Q정전, 광인일기 -루쉰, 정석원 옮김, 문예출판사 내가 읽은 책2019. 7. 19. 12:34
루쉰의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신해혁명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신해혁명
중국 최초의 정당인 중국혁명동맹회는 탄생 이듬해인 1906년부터 청조 타도를 목표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대중적 기반이 약하고 해외에서 무장 세력을 들여와 봉기를 일으켜야 한다는 한계 때문에 봉기는 번번이 실패했다. 이에 중국혁명동맹회 내에서는 봉기군의 중심을 비밀결사에서 신군으로 옮기고 투쟁 지역도 양쯔 강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됐다.
신군은 위안스카이가 새로 편성한 신식 육군으로, 청 조정의 신정에 따라 과거제가 폐지되자 많은 젊은이들이 입대했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쑨원의 혁명 사상에 동조하는 이가 많았다. 1908년 10월, 안후이성에서는 혁명 단체 악왕회가 신군과 함께 광서제와 서태후의 죽음을 계기로 '안후이 신군 봉기'를 일으켰고, 1910년 2월에는 광둥성의 신군이 '경술 신군 봉기'를 일으켰다. 이 외에도 약 10년 동안 곳곳에서 혁명 단체들의 무장봉기가 이어졌다.
그러나 혁명 단체의 무장봉기는 탄약이 부족한 데다 더 많은 신군의 협력을 이끌어 내지 못하고 모두 실패했다. 특히 1911년 4월에 자금 및 무기 부족, 계획 누설 등의 이유로 실패한 황허 강 봉기는 중국혁명동맹회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한편 당시 혁명 단체들의 산발적인 무장봉기는 청 조정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1901년부터 청 조정은 신정을 실시해 개혁을 추진했지만, 여러 곳에서 발생하는 무장봉기 때문에 개혁에 전력할 수 없었다. 비록 혁명 단체들의 무장봉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더 많은 신군에게 혁명 사상이 유포되었다.
1911년 5월, 청 조정은 철도 국유화를 발표하고 열강에게 차관을 빌려 재정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1905년 이래 청 조정은 신정을 펼쳤으며, 근대적 상공업을 운영한 입헌파 신사들이 적극적으로 이권 회수 운동을 펼쳐 광산 채굴권과 철도 부설권 등을 열강에게 회수했다. 또한 후베이성, 후난성, 광둥성 등의 철도 건설을 위해 민간 자본을 유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본은 쉽게 모이지 않았고, 막대한 자금을 조달할 수 없던 청 조정은 철도 건설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청 조정은 열강에게 차관을 빌려 철도를 건설하고자 했다. 1908년, 광서제와 서태후가 세상을 뜬 후 섭정을 맡은 순친왕은 내각을 황족 중심으로 개편하고, 철도 국유화를 발표했다. 청 조정은 철도를 민영으로 건설할 경우 오랜 건설 기간과 엄청난 비용이 소요된다는 이유로 국유화를 내세웠다. 하지만 이는 철도가 안정적인 재정 수입원이 될 것이라는 청 조정의 이해와 철도가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는 투자 대상이라는 열강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했다.
청 조정의 철도 국유화 정책으로 입헌파 신사층과 민중 사이에서 반청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철도 국유화 반대 운동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이들이 보기에 청 조정의 철도 국유화 정책은 개혁에 역행하고, 열강에게 다시 철도 이권을 내준다고 생각한 것이다. 철도 국유화를 반대하는 보로(保路) 운동은 후난성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 후베이성, 광둥성까지 이어졌다. 특히 쓰촨성에서는 '쓰촨보로 동지회'를 중심으로 철도 국유화를 반대했다. 청 조정이 이 운동에 강경하게 대응하자 보로 운동은 점차 반청 운동의 성격을 가졌다. 급기야 보로 운동이 무장 투쟁으로 발전하여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기에 이르자 청 조정은 최후 수단으로 호북신군을 파병했다.
그리고 드디어 신군의 혁명 사상에 쓰촨성 보로 운동이 더해져 혁명의 거센 파도를 만들었다. 이것이 우창(武昌) 봉기이다. 우창 봉기는 1911년 10월 10일 혁명 단체가 일으킨 무장봉기로, 청나라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 후베이성에서는 문학사(文學社)와 공진회(共進會) 등의 혁명파 세력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혁명 세력을 결집하면서 신군 내에 혁명 사상을 전파했다. 청 조정이 쓰촨성 보로 운동 진압을 위해 군대를 파견하자 당시 우창에는 소수의 신군만 남았다.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문학사와 공진회는 추석에 봉기하기로 하고 철저한 준비를 거쳐 결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우창 봉기는 이들의 계획과 상관없이 뜻밖의 사고로 황급히 일어났다.
1911년 10월 9일, 한커우 러시아 조계지에서 혁명군들이 폭탄을 제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한 혁명군의 담뱃불이 화약이 있는 곳에 떨어져 화약이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봉기에 관한 계획이 모두 들통 나고 말았다. 이로써 봉기를 위한 깃발, 공문서, 명단이 압수되고 관련자들이 체포되자, 우창의 혁명당과 신군은 봉기를 앞당겼다.
혁명군은 삼엄한 경계를 뚫고 10월 10일 저녁에 우창대의 무기고 공격을 시작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우창성 밖은 제21 혼성여단의 제11영이, 성안에서는 제29표가 혁명군에 호응함으로써 혁명군은 무기고를 쉽게 탈취했다. 혁명군은 사산 지역의 초망대에 집결했지만, 사전 준비나 계획이 미흡하여 작전을 펼칠 지휘관이 마땅히 없는 상태였다. 혁명당은 하는 수 없이 오조린을 임시로 선출한 후 총독아문으로 진격했다. 총독아문으로 진격할 때 혁명군은 2천여 명으로 세가 늘어나 있었으며, 오조린의 형인 오조기가 가담함으로써 더욱 확장되었다. 혁명군이 총독아문으로 진격해 온다는 소식에 놀란 호광총독 서징은 혁명군에 대응조차 하지 않고 도망쳐 버렸다. 밤새 총독아문을 공격한 혁명군은 10월 11일에 총독아문을 점령하고 우창을 함락시켜 호북군 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혁명군은 12일에 한양과 한커우까지 점령하여 우한삼진(武漢三鎭)을 모두 확보했다.
우창 봉기의 성공으로 호북군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혁명 전의 폭발 사고로 혁명군은 지휘부를 잃었다. 때문에 군정부의 도독 선출에 문제가 생겼다. 또한 중국혁명동맹회의 주요 지도자인 쑨원, 황싱 등이 모두 그곳에 없던 것도 원인이었다. 따라서 혁명군은 억지로 리위안훙(黎元洪)을 군정부의 도독으로 선출했다.
우창 봉기의 성공은 1개월 내에 전국적으로 퍼졌다. 후난성, 산시성(산서성), 장시성, 산시성(섬서성), 상하이, 저장성, 광둥성 등 각지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 독립을 선언했다. 이때 독립을 선언한 성은 후베이성, 허난성, 산둥성을 제외한 모두 14개 성으로 청나라의 통치는 빠르게 붕괴되었다.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성이 늘어나면서 호북군 정부는 통일된 정부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로써 각 성의 대표들은 청 조정의 반격 위험을 무릅쓰고 한커우의 영국 조계지에서 모임을 가지고 중화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역사는 이를 1911년 신해년에 일어났다 하여 신해혁명이라고 한다.
중화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총통으로 쑨원이 선출되었다. 해외에서 모금 활동을 하던 그가 1911년 12월 마침 귀국했고, 혁명당원들이 그를 매우 신망했기 때문이다. 1912년 1월 1일, 쑨원은 난징에서 취임 선서를 하고, 중화민국의 내각을 구성했다. 또한 혁명파, 입헌파, 구관료 등의 연합 형태인 임시참의원을 구성했다. 임시참의원은 2월 7일, 임시약법을 제정하여 공포했는데, 쑨원의 삼민주의를 바탕으로 한 주권 재민, 내각 제도, 국민 기본권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1911년 10월 10일의 우창 봉기가 시발점이 되어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 신해혁명은 미완성으로 끝났다. 1911년 10월, 혁명군이 중국 전역을 휩쓸고 있을 당시 청 조정은 더 이상 이들에게 맞설 힘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북양신군의 위안스카이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혁명군에 관한 일을 처리하도록 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혁명군에 맞설 의사가 없던 위안스카이는 화의를 신청했다. 이에 중국 전체에 일어날 분쟁을 우려한 쑨원이 위안스카이에게 총통직을 제안했으며, 위안스카이가 이를 수락하여 총통이 되었다. 이것은 권력이 위안스카이 중심의 구관료에게 다시 넘어갔음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혁명 세력의 약화로 이어졌다. 그래서 혹자는 신해혁명을 미완성의 혁명, 제1차 혁명이라고 한다. 이후 혁명군은 1913년에 제2차 혁명, 1915년에 제3차 혁명을 통해 중국의 황제 체제를 완전히 종식시켰다.
신해혁명이 이러한 오명을 얻은 것은 신해혁명으로 봉건 제도가 무너지고 공화 제도가 이룩되었지만, 중국 전체에 뚜렷한 변화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중국 사회와 경제는 열강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봉건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당시 중국에 민족자본주의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고, 자산 계급의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해혁명은 쑨원이 스스로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 계속 노력하자."라고 외쳤던 것처럼 미완성의 혁명이었다. 비록 신해혁명이 완전히 성공하지 못하고 제2차, 3차 혁명이라는 숙제를 남겼지만, 청나라를 멸망시켜 2천여 년간 지속된 전제 정치를 종식시킨 것은 분명하다.
[청나라를 멸망시키며 중국의 봉건제도를 무너뜨렸지만 근대화의 과정으로서의 의의를 갖고 있다. 제도의 변화가 뚜렷하지 않은 혁명으로 인민들은 혼란이 극에 달하게 되고 변화에 따른 생존의 본능으로 제 살길 찾는 데에만 혈안이 된다. 그에 따른 인간성의 파탄과 비극들이 난무하게 된다.]
아큐정전
배경은 신해혁명. 얄팍하고 부화뇌동하는 민중들. 그 와중에 아큐는 경박한 인간의 최고봉이다. 당장 눈앞의 오락거리와 욕구, 그 순간의 기분 외에 아큐가 고민하는 건 없다. 옳고 그름 따위 관심 없이 이익이 되는 일만 쫓는다. 아큐 외의 인물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단순하고 잔인한 인물들은 아큐가 누명을 써서 처형되었다는 사실에 관심도 없고 총살형이 처형으로는 심심하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혁명의 물결은 어리석은 민중들에게 눈치를 보게 하고 그를 빙자한 강도짓을 일으키며 처형이라는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것뿐이다. 작가는 내내 소설 속의 인물들을 조롱한다. 특히 아큐에 대한 조롱은 웃음이 삐어져 나올 정도다. 그러나 그것 만이었으면 이 소설은 지금까지 읽히지 못했을 것이다. 혁명이 뭔지도 모르고 먹고 살기에 급급한, 글조차 배워보지 못한 이들에게 혁명은 그저 반역의 하나 정도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중국의 신해혁명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이며 밑바닥 인생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하다.
광인일기
과대망상증을 가진 자의 일기. 아큐정전과 시대 배경이 겹친다. 광인의 문장을 통해 알레고리로 잔혹해진 세상을 비판한다. 정의 없는 폭력을 행하는 자들을 향한 분노는 엄혹한 시대에 이처럼 우스꽝스러운 형식으로 쓰여 더욱 문학적 빛을 발한다.
콩이지
엘리트 룸펜의 이야기. 그의 무력하고 비관적인 삶의 태도는 기껏 술집에서 일하는 아이에게 글의 중요함을 알리려고 잠깐 노력하는 데에 그치고 만다.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패배의식이 팽배했던 사회의 단면.
약
폐병에 걸린 자식을 위해 인간의 피로 만든 만두를 먹이지만 아이는 죽고 만다. 피의 주인은 그저 생존(혁명파 고발로 추정됨)을 위해 형제들에 의해 처형장으로 끌려간 희생자. 두 아이의 무덤은 거의 나란하다. 제대로 된 약처방이나 영양분을 섭취할 수 없는 이와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시대의 변화가 나란히 무덤에 묻힌 꼴이다.
내일
자식을 잃은 어미의 슬픔. 그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비극이 흔한 시대에 애도는 형식적일 뿐이다.
작은 이야기(알려지지 않은 수작)
변화가 극심한 시대의 거대한 사건들은 화자에게 잊혔으나 작은 사건 하나는 잊지 못한다. 가난한 자의, 더 가난하고 어려운 자에 대한 진심 어린 태도. 그에 화자는 돈 몇 푼으로 시혜를 베푼다. 화자는 못내 그 행동이 부끄럽다.
두발 이야기
중국의 쌍십절을 소재로 한 시대의 혼란. 개혁을 이루고자 하는 이는 변발을 자른 걸로 변절을 의심받는다. 깨어있지 못한 민중의 아둔함.
풍파
봉건제도를 타파하려는 혁명의 물결은 변발을 자르는 걸로 상징된다. 그 와중에 세력이 엎치락뒤치락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민초들. 소문만으로도 그들은 생존에 위협을 느낀다. 그렇게 겨우겨우 살아간다. 아이러니다. 정신이 아니라 겨우 변발이 사람의 목숨까지 좌지우지한다는 것.
고향
계급 없이 이웃의 아이와 놀고 아름다웠던 고향. 그러나 그건 화자가 어릴 때의 기억일 뿐. 믿을 사람도 없고 더욱 피폐해졌으며 계급 구분은 여전히 엄격함. 차세대는 더욱 자유롭기를 바라는 화자. 희망이라는 건 누군가에겐 우상이고 누군가에겐 절박한 것이다. 그것이 옳다 그르다,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일.
백광
무기력한 엘리트. 번번이 관리 시험(?)에 낙제한다. 세상 탓을 하며 그는 우연한 행운을 기대하며 땅을 판다. 그러나 땅 속에 행운이 있을 리가.
토끼와 고양이
예쁨을 받는 토끼와 미움을 받는 고양이. 고양이가 토끼를 해친다는 이유. 그러나 인간은 그토록 생명에게조차 차별적이다. 옳지 않다 여겨지는 상대에게 잔혹해지면서도 반성을 하지 않는다.
루쉰은 매우 위트 있고 압축된 글로 시대를 드러낸다. 그의 계급적 글쓰기는 정의라는 부분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우매한 민중에 대한 그의 태도는 연민이 가득하다. 루쉰 역시 엘리트였어서인지 그걸 뛰어넘지는 못한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어떤 시대를 그려내는 것만으로도 문학은 제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나는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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