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 이기호 소설, 문학동네 내가 읽은 책2019. 1. 13. 21:02
윤리와 환대에 관한 조금 색다른 이야기
1. 최미진은 어디로
"모욕을 당할까 봐 모욕을 먼저 느끼며 모욕을 되돌려주는 삶"
소설 속 문장에 이 소설의 함의가 모두 들어있다. 존재 증명을 타인의 환대로 하려는 얄팍함, 그저 인간 군상 중 하나인 소설가라는 인물. 이기호다운 인물 설정.
2. 나정만씨의 살짝 아래로 굽은 붐
"소설 쓰는 사람들은 원래 다 이렇게 비열해요?"
소설과 달리 현실에서는 개연성 없는 우연이 사건의 중심일 때가 많다. 그 모든 우연 뒤에는 크고 작은 보신주의와 실리가 있다. 그 보신주의의 실리에는 각기 다른 사연이 있다. 그렇게 사연이 엮여 소설이 된다. 직접적으로 저항하지 않고 글줄로나 정의를 말하는 작가라는 존재에 대한 조롱, 거대한 참사 뒤에 엮여있는 하찮은 이야기들, 그 모든 것이 서글프고 서럽다.
3.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나는 왜 자꾸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가?"
바틀비를 연상케 하는 권순찬. 그의 처지에 동조하는 주민들. 온정과 시혜만으로 약자에게 공감한다고 주장하는 오만에 대한 날카로운 일침. 자신의 도덕성에 흠결이 생기는 걸, 약자를 두고보는 걸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편함은 개인주의자의 냉정함과 견주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스템적 문제를 간과하지 않았으나 개개인의 심리적 우월감에 대한 깊은 통찰이 드러난 작품.
4. 나를 혐오하게 될 박창수에게
"때때로 나는 멜로디 때문에 가사에 속고 마니까."
타인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행위. 답을 가진 질문자와 '옳은 답'에 대한 답변자의 강제적 수긍 혹은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의무감과 부채감에 대한 이야기. 답을 비껴 살고 싶은 욕구, 욕망은 정당성에 어긋난다는 걸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인가. 그런 인물은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 그저 그렇다고 말할 뿐이다. 정답대로 사는 자의 핍진한 현실에 느끼는 숨막힘은 부끄러움으로 연결된다. 표면적인 주제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사실 갈등에 관한 이야기다. 답을 상대에게 미루는 사람, 갈등을 피하는 사람에 대한 분노이다. 필요한 갈등마저 피해버렸을 때 그것은 아예 다른 방향으로 변질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 불편함을 극복하거나 개선하지 않고 피하는 관계로 인한 분노. 김숙희의 사연의 중심은 그곳에 있는 것이다. 이후 만난 박창수와의 관계는 이전의 남편과 역전된 관계인데 김숙희는 그렇게 피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는 게 얼마나 편한 건지 알게 된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는 조금 화가 났다. 도덕을 견디지 못한 어느 여성의 일탈 정도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크게 보아 다르지 않지만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단지 그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재독의 힘이다. 어쨌거나 이 소설에서 작가는 답을 주려고 했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이럴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이 소설 속의 수동형 인물들처럼 독자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5. 오래전 김숙희는
이 소설은 앞 편과 내용이 이어진다. 김숙희와 내연의 관계였던 정재민의 이야기다. 정재민에게 김숙희는 기억하기 싫은 과거일 뿐이다. 과거에서조차 김숙희는 정재민에게 소중한 존재였던 적이 없다. 나중에 만난, 남루하고 살찐 김숙희를 보며 혐오하는 정재민. 그러니까 이 소설은 여성혐오에 관한 이야기이다. 두 사람이 그런 관계라는 것이 새삼스러울 건 없다. 뻔하디 뻔하고 속물스러운 정재민의 이야기를 굳이 작가가 왜 썼는지, 나는 모르겠다.
6.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작가는 이 소설에서 매우 불친절하다. 먼저 윤희와 강민호의 관계,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윤희의 대사 한 줄로 처리해 버린다. 강민호가 윤희와 윤희 엄마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 원인 중 하나라는 암시이다. 절박한 그들에게 비싼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었으리라. 그 빚에 아직도 허덕이며 사는 윤희가 '품위 유지'라는 명목으로 받는 억압을 정당화하는 강민호의 허술한 논리는 사실 자신이 받을 빚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또 하나 분홍색 스트라이프 비키니다. 윤희가 입었고 강민호의 아내가 오래 입은 비키니가 같은 것이라는 건 어쩌면 강민호가 빚을 핑계로 윤희와 내연의 관계였을 수도 있다는 암시이다. 애초에 강민호가 작은아버지를 설득하러 간 일조차 강민호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강민호가 윤희를 설득하려고 했던 이유는 윤희가 직장에서 잘려 빚을 갚을 수 없을까 봐, 이다. 강민호의 친절은 우리나라 교회처럼 탐욕스럽다.
7. 한정희와 나
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환대'에 관해 본격적으로 다룬 소설이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차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환대한다는 일의 어려움 같은 것들. 약자에게 기대하는 피해자성(이는 반대로도 성립한다)은 인간이 얼마나 얄팍한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겨우 그만큼이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되는, 가진 자들의 오만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은 쓰고 차갑다.
재독했다. 조금 더 선명하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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