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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접한 제발트, 이민자들.

요란하고 떠들썩한 환호를 받는 작가에게는 성큼 다가서기가 쉽지 않다. 이제서야 제발트를 읽게 된 이유다.

 네 편의 이야기로 구성된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이민자들을 다루고 있다. 전쟁에 의해, 즉 나치즘에 의해 비자발적 이민자가 되어야 했던 유태인들, 그들을 독일인인 제발트가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제발트는 그들의 행적을 좇으며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다시 재구성한다. 괴롭고 힘든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외면하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삽입된 사진을 통해 실화임을 알 수 있지만 제발트의 문장으로 다시 태어난 작품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온전히 사실만 담아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고통만큼은 실재하는 것 이상으로 생생하게 다가왔다.

 네 편의 인물과 이야기가 다르지만 굳이 분리할 필요성을 나는 느끼지 못한다. 오래 전부터 이민자로 살아왔던 유태인들은 자신이 속한 국가과 지역을 중요한 정체성으로 삼고 살아갔을 것이고 그것이 완전히 부서저버린 어느 날부터 유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 크게 깨달아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자부심이 아닌 고통으로 다가와야 하는 불합리한 이유에 대해 조금도 납득하지 못한 채. 인물 중에는 일부만 유태인인 사람도 나온다. 유태인이라면 가장 끔찍한 낙인을 피해갈 수 없었던 시절, 그 자신의 혼란은 자살로 생을 마칠 때까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1. 헨리 쎌윈 박사-기억은 최후의 것마저 파괴하지 않는가

 2. 파울 베라이터-어떤 눈으로도 헤칠 수 없는 안개무리가 있다

 3. 암브로스 아델바르트-내 밀밭은 눈물의 수확이었을 뿐

 4. 막스 페르버-날이 어둑해지면 그들이 와서 삶을 찾는다

 소제목만으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작품 속 인물의 구체적 고통을 다시 언급하는 건 큰 의미가 없을 듯하다. 다만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들여다 볼 용기가 있는지, 다시 한 번 물을 수밖에 없다. 부당해고로 직장과 가족을 잃고 높은 곳에서 농성을 잇고 있는 이들 역시 또 하나의 이민자들이 아닐까 싶다.

 아쉬운 점을 꼽자면 딱히 재미 있는 소설은 아니었고 나쁘지 않았으나 드물게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 거슬렸다.

 해설 중 나온 문장으로 이 작품평을 끝내고자 한다.

 "추구를 위해 고향을 떠난 사람ㅇ게 고향은 긍정적인 것으로 남기 쉽고, 회피를 위해 고향을 떠난 사람에게 고향은 부정적인 것으로 남기 쉽다."

 

:
Posted by 박모모

김영하 소설집을 읽다

 

김영하를 특별히 좋아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김영하를 읽고 싶을 때가 있다. 내 속에 답답함과 우울이 차오를 때이다. 도서정가제 시행 전 사둔 책을 집어들고 목차를 살폈다. 이런, 읽은 작품이 반이었다.

 총 9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집을 기어코 다 읽은 건 사실 본전 생각 때문이었다. '비상구' 같은 경우는 몇 번을 읽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잘했다는 생각. 다시 읽고 또 읽어도 좋은 작품은 좋다는 결론, 그리고 전에 보지 못한 것을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은 발견하게 된다는 결론.

 1.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서로를 의심할 뿐 무관심하기 그지 없는 현대인들의 일상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무언가 달라질 기미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작품집 전체에 깔린 허무주의의 시작이었다. 다만 사건의 우연성이 지나친 듯하여 아쉬웠다.

 2. 사진관 살인사건

 사실이 아닌 진실에 관한 알리바이라는 건 애초에 성립이 가능한 걸까? 살인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이 내놓는 진실과 이면은 그 무엇이 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혼동 자체를 보여준다. 더불어 자의적 진실과 사실 사이의 거리가 결코 가깝지 않음도.

그들처럼 인간은 대체로 증명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비도덕적이고 무책임하겠지.

3. 흡혈귀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해 다름에 대한 이해나 수긍보다는 차라리 다른 종족임을 더 믿고 싶어할 정도로 인간들은 이기적이고 한계가 뚜렷하다는 것. 이 또한 허무하지 아니한가.

 4. 피뢰침

 벼락을 맞고 다시 벼락을 맞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집단 광신도들을 닮아 있다. 공포를 통해 얻는 오르가즘은 궁극적으로 공포를 잊기 위한 것. 일종의 마조히즘.

 5. 비상구

 섣부르고 경박하고 폭력적인, 모텔의 창문을 깨는 것 말고는 다른 출구가 없는 그들에게 응원을 보내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언제나 현재진형형인 일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6. 고압선

 돈 외에는 자신을 증명할 방법이 없는 비루한 가장의 이야기. 존재감을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러나 작중 화자 스스로도 자처한 일이 아닐까. 안전한 삶만을 추구했으니.

 7. 당신의 나무

 화자에게 나무의 생존력은 공포다. 그악스럽게 다른 존재를 해치면서까지 뻗어나가는 뿌리들, 그것이 나무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을 터. 작품에서는 나비효과에 대해 언급한다. 원인과 파장과 결과라는 것은 자의적이며 상호 관계임을 말한다. 사람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 앙코르와트 사원의 나무와 부처의 관계에서 화자는 또 다시 진저리친다. 나무가 부처상을 휘감아 부순다. 그러나 그는 승려에게 부처상이 나무의 갈 길을 막고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 살아가면서 내내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다.

 8. 바람이 분다.

 인터넷게임 상황과 남녀의 상황을 절묘하게 교차시킨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묘사는 흔하긴 하지만 잘하긴 어려우므로. 어쨌건 이 작품에선 미래의 자유를 위해 현재의 구속을 감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미래의 자유란 오지 않을 여자. 그러나 오기를 바라는 여자. 그것은 희망일까 정말일까. 나는 답을 못 내리겠다.

 9.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잃어버린 소리를 찾다가 세계 폐허 기행을 가게 된 남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을 내내 찾아다녀야 하는 남자는 여행도중 한 여자를 만난다. 작품 말미에 그 여자는 그 남자가 잃어버린, 혹은 거울 속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자신의 여성성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그것은 아니마인가? 이 작품에서는 딱히 그래 보이진 않는다. 그래서 이 남자차 궁극적으로 찾으려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최근 백민석 소설집을 읽어서인지 김영하 작품들이 더 가볍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이 김영하의 매력임을 잊지는 않았다.

:
Posted by 박모모
2015. 1. 2. 00:05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내가 본 영화2015. 1. 2. 00:05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 관한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평

예고편에서 ‘유난히 금슬 좋은 부부’, ‘배우자의 죽음’이라는 두 개의 큰 소재를 보면서 이 다큐멘터리영화가 어떻게 그려질 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극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딱히 구미가 당기지 않는 조건이었다. 나의 예상을 벗어난 건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였다. 초등학생들을 위한 여러 영화를 놔두고 굳이 이 영화가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반쯤은 의아한, 또 반쯤은 기특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게 되었다. 결과는 예상치 그대로였다.

영화의 내용은 간단히 소개했다시피 노부부의 삶과 죽음을 다룬 것이다. 특이해 보일 정도로 사이가 좋은 시골의 노부부는 평생 서로를 의지하고 살아온 티가 역력했다. 다정히 주고받는 대화, 어린아이 같은 장난, 곱게 차려 입는 커플룩. 100살에 가까운 노인과 90살에 가까운 노파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바로 그 순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에 있다고 느껴졌다. 이 영화가 의외의 흥행을 거둔 것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늙고 싶다는. 미워서 악다구니 치고 마지못해 살아가는 수많은 부부, 아니 수많은 관계들을 돌아볼 때 노부부의 삶은 보통의 사람들이 바라는 이상향이라 말해도 넘치지 않을 것이었다. 더불어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자세에 대한 배움도 있었다. 더 이상 손 쓸 수 없게 된 남편이 죽음을 맞으러 병원으로 실려 간 후 노파는 침착하게 수의를 빨아 빨랫줄에 넌다. 요란하지 않은 노파의 태도에서 후회 없이 인생을 살아온 이의 관조가 엿보였다. 관객들 역시 요란하지 않게 흐느꼈다.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을 잃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2인칭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죽음이 딱히 비극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공통의 경험과 공통의 감정에 기댄 영화였다.

영화는 대중성과 상업성을 기반으로 한 문화 사업이다. 다만 취향의 문제로 봤을 때 내겐 그다지 좋은 영화가 아니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두 개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떠올랐다. ‘아르마딜로’와 ‘워낭소리’이다. 전작은 해외작으로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이 겪게 되는 심리적 변화를 심도 있게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극적인 환경에 노출된 인간이 평상적인 환경을 못 견디게 되는 상황 앞에서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한 개인의 문제라고만 보기엔 인간은 그렇게 강하지 못하다는 것, 결국 살육과 긴장이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 겪어야 할 남은 삶에 대한 고찰. 영화는 전쟁이 인간에게 미치는 보이지 않는 폐해를 다루고자 한 것이었다. 사람, 삶, 세상에 대해 통찰을 드러내는 작품이어서 내겐 아주 인상 깊게 남아있었다. 후작은 사람과 동물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적인 행태와는 별개로 서로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관계는 다만 사람과 동물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 두 영화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와 구별되는 점은 예쁘고 뻔하게 포장하지 않았다는 것과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세계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 그저 보여주기만 함으로써 완성되어야 하는 메시지가 너무 식상했다. 노부부는 사이가 좋고 그림도 예쁘지만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단절이나 다름없는 삶을 산다. 그럼에도 해맑고 특별한 고민도 없다. 실제로 그랬을 것 같지는 않지만 영화의 메시지를 단선적으로 만들기 위해 감독이 의도했을 것이다. 그런 삶이 정말로 가능하며 또한 아름다운 것일까. 나는 내내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과정과 고통을 외면하여 포장한 삶에 공감하기엔 현실이 그리 녹록치 않기 때문이었다.

난 잠시 고민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좋은 영화인가, 나쁜 영화인가. 이 영화가 누군가에게는 미처 깨닫지 못했거나 잊었던 부분들을 자극했으리란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답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었다. 죽음에 조금 더 가까워지는 나이가 되었을 때, 어쩌면 그렇게 순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내게 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아직까지는 극적이고 통찰이 매서운 영화를 선호하기에 내 또래의 다른 이들에게 권하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나중에 다시 꺼내보게 될 지도 모르는 영화였다. 그렇게 된다면 이 영화에 대한 내 평은 달라질 것이다. 어쨌건 삶은 아름답다는 생각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그 생각이 아직은 어린 내 딸아이에겐 이미 전해졌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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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모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