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의 축제 - 바르가스 요사, 문학동네, 송병선 옮김 내가 읽은 책2015. 2. 4. 10:13
독재의 역사, 여전히 어디선가는 진행 중인
- 염소의 축제, 바르가스 요사
페루 출신 바르가스 요사의 작품을 처음 읽었다. 남아메리카 소설에 대해서는 선뜻 손이 가질 않아서다. 이질감도 한몫했고 어렵거나 정제되지 않은 리얼리즘이거나, 내 경험은 그러했다. 이 소설은 그런 나의 편견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중남미 정치에 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덕분에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독재가 유난히 많았고 남녀차별이 극심하고 그러나 저항도 많았던, 이렇게 짧게 표현하기엔 부족하지만, 그런 역사는 어쩐지 익숙했다.
이 소설은 도미니카의 독재자 트루히요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쩌면 거친 리얼리즘 소설이 될 수도 있었지만 바르가스 요사는 문학적 거름망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소설은 세 이야기를 장 별로 나누어 동시에 진행시킨다. 트루히요의 독재 정치에 관한 이야기, 그를 암살하는 이들의 이야기, 트루히요의 독재 아래에서 고통 받았던 한 여성의 이야기. 인물이 워낙 많아 좀 헷갈리지만 시간 순서는 헷갈리지 않는다. 시점의 변화도 자연스럽다. 즉, 어렵게 읽히지는 않는다.
전권을 가진 독재자가 얼마나 비열한지, 더불어 그의 통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 비열한지, 최소한의 자존심이나 지성마저 마비시키는 독재정치의 구체적 현상에 대해 소설은 잔인할 정도로 자세히 이야기한다. 사회구조적 문제와 인간 개인의 문제를 깊이 파헤치면서 적절히 배열하여 문학적 완성도를 추구했다.
소설의 구체적 에피소드를 언급하는 것보다는, 정치와 사회와 인간에 의해 가장 약한 존재로 살아가야 했던 중남미의 한 여성(우라니아)의 자기 고백을 듣는 건 정말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야 말로 비겁한 짓이라는 걸 작가는 이야기한다. 그 누구도 그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세상이 진일보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필요하다는 점도. 교훈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보여주면서 말하는 것이다.
우라니아의 고통이 진정으로 이해 받을 수 있을까. 소설 속 인물들에게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만큼 우리는 가진 생각을 바꾸기도 어렵고 남의 사정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독자 또한 얼추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극한의 고통들에 대해.
나쁜 정치가 어떻게 인간성까지 말살하는지 보여주는 소설이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단순하다. 그럼에도 더 이상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은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느꼈던 고통이 아직 가시지 않아 객관적으로 정리가 되지 않고 있어서다.
이런 용감한 작가를 존경한다.
덧붙여, 트루히요의 별명이었던 '염소'의 상징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색정광이면서도 결국 제물이 될 수 밖에 없는 존재. 스스로를 제물로 삼아 한 국가를, 한 국가의 국민들을 유린하고 마는 존재. 나는 그렇게 해석했다.
초기작에서는 작가가 여성에 대한 가치판단이 다소 미진하다는 평을 읽었다. 한 번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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