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부학자 - 페데리코 아나아시, 조구호 옮김, 문학동네
여성의 쾌락, 중세의, 어쩌면 현재도 금지된 욕망
- 해부학자
책장에 꽂혀있는 전집을 고를 때 되도록 들어보지 못한 작가, 흥미로운 제목부터 집으려 한다.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을 위해서다. 이번 소설은 정확히 그 목적에 부합되었다.
소설은 중세시대의 르네상스기를 배경으로 한다. 금지와 터부와 탐구와 욕망이 넘쳐나던 시절이다. 작가는 실존 인물의 저서를 바탕으로 하여 당시의 터부를 유추한 후 이야기를 만든다. 여성이 성녀이거나 마녀이거나 창녀이던 시절이다. 그러한 구분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쾌락에 몰두할 수 있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존재로 규정한다. (이에 여성이 영혼이 없다는 작중 인물의 주장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성의 쾌락이 클리토리스(작가는 이것을 여성의 음경이라 표현하였다)에 지배를 받는다는 발견은 신대륙의 발견보다 가치가 적지 않다는 주장이다. 여성의 억압받은 역사를 봤을 때 이는 지나친 주장이 아니다. 작중 인물 중 스스로 성녀의 반열에 올랐다 쾌락으로 병을 치유한 후 자신의 쾌락(클리토리스)를 제거하고 주체적인 여성(소설에서는 창녀로 제한된다)으로 살며 그런 방식을 널리 전파하는 이만 봐도 그렇다. 디테일만 가지고 작가의 의도를 오해한다면 함의라는 걸 읽을 줄 모르는 독자일 것이다. 작가는 성과 주체성을 회복하는 여성상을 그려내고 있다. 화자가 사랑하는 창녀만 보더라도 제한된 환경에서 스스로 삶을 터득하고 비록 비참한 죽음이지만 남성에 의해 지배받지 않는 모습을 지켜내고 있다.
해학이 자연스레 배인 천연덕스러운 문장. 판결 과정의 매우 경직된 문장. 박학한 지식. 그리스 신화와의 접목. 가독성. 구성력. 모두 대단하다고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가 많은 지식을 가진 것이 소설의 흐름을 방해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 소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르헨티나 작가이고 1963년생이다. 세상에. 이렇게 남미에 대한 나의 편견을 깨버리는 작가라니. 내 독서력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깨달았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스타일의 소설이다. 나를 믿는 사람이 있다면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