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

하늘의 뿌리 - 로맹가리, 백선희 옮김, 문학과지성사

박모모 2016. 4. 18. 12:41

코끼리에 관한 아주 특별한 고찰

- 하늘의 뿌리

이 소설의 키워드는 단연코 '코끼리'이다. 이 소설에서 코끼리는 구체적 대상이기도 하지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가치이기도 하다. 코끼리를 지키려는 인간, 코끼리 따위 안중에 없는 인간, 코끼리를 해치려는 인간 등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이 소설 내의 '코끼리'가 갖고 있는 의미를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그에 동의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고민을 치열하게 따라가야만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분량도 많지만) 읽기가 쉽지 않다.

강제수용소에서 절망하지 않고 견디어 내는 방법으로 모렐은 코끼리가 뛰어다니는 아프리카 대륙을 상상한다. 너무 큰 몸집이지만 제약 없이 풀을 뜯고 물을 마시고 이동을 하는 코끼리는 어쩌면 자유의 상징이다. 억압된 처지에서 그런 자유를 상상하는 것은 로망이고 희망이고 판타지이다. 그 모든 것은 굳이 대상을 특정화할 필요 없는 '존엄'으로 귀결된다. 모렐에게 코끼리가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할 대상이었던 이유다. 코끼리는 생물이고 자연이고 가치였던 것이다.

물론 코끼리는 구체적 대상으로서 고기를 위해 원주민에게 사살 당하기도 하고 상아를 위해 이주민에게 살육되기도 하며 단지 폭력의 쾌감을 위해 사냥꾼에게 학살당하기도 한다. 원주민도 이주민도 사냥꾼도, 한 개인으로서의 연민을 둘 가치는 있으나 모든 방향성이 존엄을 위한 가치로 가야 하는 당위성을 이 소설 속 몇몇 인물들은 내내-주변의 비아냥에도 불구하고-주장한다.

모렐의 정신과 가장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미나. 전쟁을 겪었고 모렐 이상의 고통을 겪었던 미나는 접대부였던 과거와 지적이지 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장 많은 오해를 사고 있다. 어쩌면 미나는 또 다른 '코끼리'다. 그저 덩치 큰 애물단지처럼 대상화로서만 존재해 온 수많은 약자들의 표상이다. 그런 미나가 영웅화 된 모렐처럼 고결한 가치를 추구한다는 걸 대부분의 인물들은 믿지 않는다. 코끼리를 지키고 자연을 지키는 일이 바로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는 일이라는 걸 믿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많은 분량만큼 많은 인물과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런 순수한 가치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 그것을 이용하여 제 이익에 보태려는 사람들, 그런 고결함을 견디지 못해 공격을 하는 사람들. 그런 다양한 양상을 매우 복잡하게 얽어놓았으나 큰 줄기를 따라 가면서 읽다 보면 그것들은 모두 욕망에 눈이 어두워진 흔하고 흔한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재밌는 소설은 아니다. 로맹가리 소설 중 상당히 규모가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소설이 너무나 좋다. 눈에 보이는 가치 외에도 우리가 꿈꾸는 수많은 꿈과 가치의 위대함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