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 김은국, 도정일 옮김, 문학동네
절망을 대하는 사람들의 각기 다른 철학, 그리고 태도
- 순교자
세계문학전집 속에 있는 한국인의 소설이라니. 일단 꺼내 표지를 펼쳤다. 미국에서 발표된 소설이었다. 다 읽은 후 만약 한국에서 발표되었다면, 아니 발표가 될 수 있었을까, 아찔했다.
절제된 문장, 탐색담 형식, 독자의 예상을 비껴가는 진행, 인간과 신과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고찰, 모두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쉽게 이 작품을 판단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게 주어진 고민이 있는 만큼 그냥 넘어갈 수도 없어 두서 없는 후기를 남기고자 한다.
시대는 한국전쟁, 배경은 1.4후퇴 전 국군이 평양을 탈환한 때이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평양의 기독교는 북한군에 의해 탄압을 받았고 14명의 목사는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다. 신을 부정하고 자본주의를 부정하기를 바라는 그들의 고문에 의해 대부분의 목사는 쉽게 굴복한 후 죽임을 당한다. 그 와중 저항했던 신 목사와 정신을 놓은 한 목사만 살아남는다. 이 비밀이 밝혀지기까지 인물들의 고민과 정치적 계산에 대해서는 굳이 요약하지 않을 것이다. 줄거리로 후기를 채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에 대해 끝까지 비밀을 지키며 오히려 자신을 배신자로 설명하며 유다를 자처하는 신 목사와 장 대령과 이 대위의 고민들에 대해서는 생각이 많다. 결과적으로 세 사람 다 신을 믿지 않는다. 인간의 절대적이며 무의미한 고통 앞에 무기력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건 지성의 작용이었으리라. 다만 세 사람이 택하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이 대위는 진실을 밝히기를 바란다. 거짓으로 사람을 위안하기보다는 진실의 불편함을 택하려는 것이다. 어쩌면 고지식한 지식인의 전형이다. 장 대령은 남한(미국에 의해 영향을 받는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데 이용하기 위해 12명의 목사를 순교자로 둔갑시키고자 한다. 어차피 진실은 묻어둬도 진실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 즉, 진실을 밝혀 어차피 거스를 수 있는 대의를 거스르지 말자는 것이다. 신 목사는 기꺼이 거짓을 택한다. 자신이 핍박 받는 건 문제가 아니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죽음 앞에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한 헛된 믿음이 주는 위안을 위해서다. 물론 나는 신 목사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지만 이것이 전쟁통이기에 납득이 된 면이 있다. 신의 존재 여부보다 더 중요한 건 자신을 가치 있다고 믿게 만드는 거짓이라는 주장이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신 목사에게 직간접적으로 감화를 받고 자기 스타일의 최선을 다해 인간의 품위를 지킨다.
전쟁을 겪지 않은 자로서 나의 철학을 가볍게 말하자면, 삶과 죽음이 거짓 희망으로 포장해야 될 만큼 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겪는 자들은 고통스럽다. 그 고통을 어루만지는 작은 위로가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아편'의 역할이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인간의 고통에 잔인한 사람은 아니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작가는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는 어느 명제를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그에 대한 정당함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간에 대한 애정 없이 진실이라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느냐는 질문을 하고 있다. 인물마다의 입장 차이로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가의 고민과 통찰이 지나치게 단정적이지 않아 좋았다. 어쩌면 작가는 분명한 입장을 드러내고 있지만 내가 그렇게 느끼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의도한 오독이지만 그 과정이 충분히 진지했고 어쩌면 행복했다. 이런 훌륭한 작품을 만나서 행복하다고 말하면 중언부언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