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목가 - 필립 로스,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미국을 파헤치다
- 미국의 목가
중심인물부터 살펴보자. 먼저 스위드. 금발의 유대인이라는 외적 조건이 말해주듯 그는 이민자의 본질적 특성을 가졌지만 가장 미국적인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다. 유대인들이 미국 사회의 중심에 자리 잡기 어려웠던 시기, 스위드는 빼어난 외모, 운동 실력, 겸손한 태도 등 어디서나 인정받는 인물이다. 능력뿐만이 아닌 미국적 특징이 강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미국적이라는 건 대체 무엇인가. 그건 작품 전체를 이야기할 때 다시 언급하겠다. 스위드의 부친 루 레보브는 보수적이고 고지식하며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다. 그가 그린 미국적 가정을 이루어내는데 스위드가 가장 충실한 반면 둘째 아들 제리는 모든 면에서 반항적이고 제멋대로다. 즉 실패를 알고 있다. 인정하지는 않지만. 스위드의 아내 돈. 미인대회 출신이지만 하층 계급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강하다. 미인대회 출신이라는 것도 콤플렉스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미모에 대한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스위드와 돈의 딸인 메리. 욕구 불만과 내재된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것은 미국 사회의 혼란과 맞물려 큰 사건을 만들어낸다.
경제적인 여유, 타인과 마찰을 빚지 않는 성품, 단란한 가정, 미모의 아내 등 스위드가 생각하는 행복은 잘 짜 맞춰진 기성품 같다. 이민자로 구성된 미국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계급을 만들었고 그 이민자들은 어떤 조건으로 가능한 계급 상승을 최고의 목표로 여긴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과 맞닿아 있다. 그럼에도 스위드가 겪는 혼란은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다. 딸 메리의 비행, 그에 대한 스위드의 태도와 결국 드러나고 자기 해체의 과정이 이 작품 안에는 매우 신랄하게 그려지고 있다. 문제점은 개인과 사회가 맞물린 형태로 드러난다. 즉 미국 사회의 천박한 속성과 인간의 가치를 외적 조건에만 두는 개인의 천박한 속성이 맞물렸을 때의 비극인 것이다. 옳다고 믿는 것에 정직하고 성실한 스위드, 남에게 해를 끼칠 줄 모르는 스위드는 그러나 그런 인간의 예외성을 고찰할 수 있는 철학에 이르지는 못하는 인물이다. 그런 철학 따위 우습게 아는 사회에서 스위드는 가장 모범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는 제 자신의 욕망이나 분노조차도 직시하지 못하는 로봇형 인간이다. 그런 인간들이 사랑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주변인들이 제 범주를 벗어났을 때 스스로 통제할 능력을 잃어버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메리 역시 시스템적 저항을 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다. 반전주의자로서 폭탄 테러를 하고 자이나교로 개종한 메리는 생명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씻지도 않고 먹지도 않는다. 사람을 넷이나 죽였던 부분에 대한 반성은 없다. 그저 극단적인 행위만이 메리를 숨쉴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매우 비도덕적인 인물이지만 난 메리에게 연민을 느꼈다. 자신의 감정조차 직시할 줄 모르고 전형성의 틀에 갇힌 부모는 원하는 자식의 형태로 메리를 키우려고 했을 뿐 메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끝끝내 알지 못한다. 외형적으로 메리는 사랑 받았고 존중 받았지만 내용적으로 메리의 부모는 제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했던 것이다. 그로 인한 파국의 결정체가 메리다. 메리가 좀 더 중요한 인물로 다뤄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안 그래도 방대한 이 소설이 갈 길을 잃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긴 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마지막을 장식한 스위드 집에서의 저녁 파티다. 루 레보브는 경직성과 단순성을 조롱당하고 급진주의자 마샤는 그저 모든 걸 비웃기만 한다. 아름다운 스위드 부부의 외도도 드러나게 된다. 서로에 대한 언사는 매우 공격적이고 콤플렉스는 자신에 대한 정당화와 상대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인간이 가진 부정적 측면의 총체이다. 그럼에도 이 저녁의 파티는, 비록 위태롭지만, 외형적 평화가 유지된다. 제 속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음으로 폭력적인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만이 우월한 미국인의 태도라는 듯이.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알콜중독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제시를 교화하려던 루 레보브는 그녀에게 포크로 눈이 찔리는 참사를 당하고 극단적 생명존중자인 메리는(자동차 이용을 거부했던) 기차를 타고 집에 왔다가 참사를 목격하고 도망친다. 끔찍하고 무거운 장면인데 웃음이 나온다. 왜냐하면 미국적인 총체가 저녁파티에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선적인 태도, 형식적인 평화, 결국엔 참사가 벌어지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에브리맨으로 처음 접했던 필립 로스가 왜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지 이 작품을 통해 알게 되었다. 더불어 미국의 치부를 드러낸 소설들 중에서도 수작이라고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