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권택영 옮김, 민음사
내겐 여전한 숙제, 롤리타
10여 년 전, 이 소설을 읽고 너무나 불편했던 나머지 상당한 오독을 했던 듯해 재독을 결심하던 중 나보코프의 '절망'을 읽게 되었다.
혐오와 비도덕성이 바탕이 된 소설은 위험하다. 그러나 그 위험성이 가져다주는 짜릿함이 있다. 제대로 읽지 않는 독자에겐 비도덕을 정당화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재독한 롤리타는 여전히 불편했다. 절망에 비해 유난히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단순하고 명확하다. 이 소설이 강간서사로, 그것도 소아 강간서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도덕적 평가는 별개의 문제로 친다 해도, 험버트가 전형적인 소아성애자라고 해도, 소아 강간은 권력형 폭력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시엔 작가가 험버트를 옹호한다고 여겼으나 다시 읽어보니 험버트의 '순수한' 사랑을 옹호하는 비평가들에게 불편함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험버트의 마음이 진심이라고 해서 스토커적 기질과 권력형 강간을 미화할 수는 없는 일이다. 험버트를 유혹하는 롤리타의 기질을 문제 삼는 데에는 실소가 나온다. 자신에게 호의적인 어른을 향한 롤리타 식의 유혹에 대한 혐의는 강간 가해자가 피해자의 행실을 탓하는 구조와 한 치도 다르지 않다. 강간로드에서 롤리타가 고통을 느끼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험버트는 아직 어린 롤리타를 협박하고 고립시킨다. 그 묘사가 아름답다고 해서 그 행위까지 미화시킨다는 건 나로서는 그저 유행에 따라 찬사를 얹는 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다시 읽으며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작가는 험버트의 행위를 미화하지도 않았고 험버트의 자기기만과 자기경멸을 신랄하게 드러냈다는 것이다. 과도한 비평이 가져온 결과로 롤리타가 소아성애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흐리는 현상에 대해서는 깊은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이 소설을 더는 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