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

거미여인의 키스 - 마누엘 푸익, 송병선 옮김, 민음사

박모모 2019. 12. 16. 10:13

이 유명한 작품을 이제야 접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감옥에 갇힌 좌파 발렌틴과 미성년과의 성관계 문제로 수감된 몰리나의 이야기다. 모든 성향이 다른 두 사람을 잇는 건 몰리나의 영화 이야기다. 몰리나는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 한 지정 성별 남자이고 발렌틴은 혁명을 꿈꾸는 엘리트 좌파 남성이다. 몰리나는 자신을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에 가둔다. 예를 들면 남자는 잘 울지 않고 강하고 거칠어야 한다고, 반대로 여성은 약하고 의존적이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여성으로 인정 받고 싶어하는 트랜스젠더의 일반적인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발렌틴은 전형적인 헤테로 남성이고 혁명을 꿈꾸는 자들이 그렇듯 인간 사이의 사랑이나 관계보다 목적 의식에 투철하다. 처음 몰리나가 영화 이야기를 시작할 때 발렌틴은 내용을 계급적으로 분석, 비판한다. 몰리나는 영화 그 자체에 몰두하는 스타일이라 그런 발렌틴의 분석이 불편하다. 영화의 주제보다 인물 사이의 관계나 장면의 아름다움, 여성 주인공의 아름다움에 더욱 심취해 있다. 몰리나는 감옥 소장으로부터 발렌틴에게서 정보를 빼내는 스파이 역할을 제안받는다. 거절할 수 없다. 몰리나는 영화 이야기와 아픈 발렌틴을 지극정성으로 보호하며 발렌틴의 감정을 흔들어놓는다. 발렌틴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동지들과의 공동 목적보다는 상위 계급에 반동적 행위를 일삼는 여성에 대한 감정이 드러난다. 몰리나를 계속 남성이나 게이로 취급하던 발렌틴은 결국 몰리나를 여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몰리나는 스파이 짓을 하면서도 역으로 발렌틴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려 소장을 이용한다. 결국 발렌틴에게 정보를 빼낸 몰리나는 발렌틴이 원하는 혁명적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발렌틴이 시키는 대로 혁명 운동을 하다 살해당한다.

 

이 소설이 훌륭한 점은 접점이 없는 두 인물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위해 솔직해지는 과정이다.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발렌틴은 결국 몰리나에게 절대로 여성으로서 남들 앞에서 고개 숙이지도, 나약해지지도 말라고 충고한다. 세상이 여성에게 요구하는 역할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건 몰리나를 여성으로 인정하는 결과에 다름없다. 계급의식이 없는 몰리나는 결국 자신이 도구로 쓰여질 걸 알면서도 발렌틴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그 모든 과정 속에 영화가 있다. 재해석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에 따라 영화를 재구성해가며 발렌틴이 낭만과 사랑에 대해 받아들이기를 목적했던 몰리나는 영화의 어떤 결말에 대해 발렌틴이 받아들이는, 그래도 한때 마음껏 사랑을 했던 인물의 비극을 단순히 비극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라는 태도를 통해 발렌틴이 몰리나의 비극을 예견하면서도 발렌틴이 몰리나를(마지막에 굳이 사랑했던 여성을 떠올리지만 영화 내용의 끝 장면은 몰리나가 이야기해준 이야기에 기반을 둔다) 잊지 않고 사랑을 통해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대단히 메타텍스트 적이며 포스트모던하다.

 

순소설이지만 대중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잘 읽히고 재미있으면서도 분석할 맛이 나는 소설이다. 작가는 엄격한 장르적 구분보다 순소설의 외연 확장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성정체성은 그러데이션이라는 현재의 주장도 있지만 소설에서는 몰리나를 트랜스젠도로 설정하는데 해설은 동성애자로 내내 주장하고 있다. 해설이 가장 아쉬웠다.